by for healing Oct 14. 2024
신기하다.
거머리 세 마리가 내 발가락 주위에 매달려서 피를 빨고 있다니...
한의원 선생님은 내 상처를 보시자마자 확답은 안 했지만 절단을 위해 예약한 대학병원 수술일정은 보류하고 일단 세 번만 거머리치료를 받아보자고 하셨다. 그리고 이건 순환에 문제가 있어서 상처가 덧난 것이지 버거씨병은 아니라고 하셨다.
어느 의사 선생님 말이 맞든 지 간에 나는 낫기만 하면 되니까~바로 그날부터 치료를 시작했다.
시골 논두렁에서 보는 그런 거머리가 아니고 치료용으로 외국에서 수입한 거머리란다.
무식한 얘기로 외국에도 거머리가 있는 줄 몰랐다.
'외제 거머리'ㅋㅋ
징그러웠지만 치료를 위해서 참았다. 3cm 정도 길이에 가늘던 놈들이 내 피를 먹더니 가운데 손가락만큼 길어지고 통통해지더니 배가 부른 지 약 한 시간 정도 후에는 저절로 떨어져 나간다.
그러고 보니 옛날 동의보감에도 심한 염증에 거머리를 사용한다고 했던 걸 들은 기억이 있다.
내 경우에는 상처가 심해서 처음 몇 주간은 일주일에 한 번씩 치료를 받았다. 세 번째 치료를 마쳤을 때 선생님이 효과가 있을 것 같다며 수술일정을 아예 취소하고 이 치료로 해보자고 하셨다.
그렇게 몇 번 치료를 받다 보니 처음에는 그렇게 징그럽게 느껴지던 거머리가 나를 낫게 해주는 친구로 여겨져 사랑스러워질 정도였다. 간사한 인간ㅎㅎ
'헌 집 줄게 새 집 다오'가 아니라
'내 피줄게 낫게 해 주렴'이 되었지만... 거머리 입장에서는 비록 열심히 피를 빨아먹을 때에는 곧이어 자기 목숨도 폐기된다는 걸 몰랐겠지... 미안하다...
비용도 만만치 않고 일주일에 한 번씩 나 때문에 남편과 딸들이 교대로 운전해 주는 게 미안했지만 가족들 덕분에 마음 편히 치료를 받았고 진통제도 많이 줄였고 통증 때문에 밤을 꼬박 새우는 일도 거의 없어졌으며, 걷는 것도 좀 나아졌다.
다리가 아파 잘 못 걷게 되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횡단보도를 건널 때 신호가 끝나가도 뛸 수 없었고, 정장구두, 아니 심지어 발가락 끝에 신발이 닿으면 너무 아파서 한 겨울에도 큰 슬리퍼를 신고 발가락이 신발 앞코에 닿지 않도록 끌고 다녔다. 잠시 외출할 일이 있으면 두 딸이 내 양쪽에서 나를 에스코트해 주었다. 혹시라도 다른 사람들이 실수로 엄마 발을 밟을까 봐...
그 덕분에 한 번 더 내 주변을 돌아볼 여유가 생겼다.
건강할 때 운전하다가 신호에 걸려 서있으면서 횡단보도를 신호 바뀔 때가 다 되어가는데도 천천히 건너는 사람들을 보며
"좀 빨리빨리 건너라, 신호 바뀔 때 돼 가는데 그렇게 천천히 걷냐?" 라며 타박하곤 했다.
그랬던 내가
'횡단보도 빨리 못 건너가는 사람한테 짜증 내지 말아야지, 저 사람도 나처럼 다리가 아파서 빨리 못 걷는 거일 수도 있잖아 '
하이힐이나 딱 맞는 신발을 신고 다니는 사람들을 보면서는
'그래, 건강할 때 마음껏 신고 다녀라'
발이 아파보니까 아무 신발이나 신고 뛰어다니는 게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오늘도 코로 숨 쉬며, 밤새 잘 자고 아침에 깨어나는 것, 아무거나 먹을 수 있고, 내 힘으로 화장실 가서 볼일 보고, 아침에 나간 모습 그대로 저녁에 집에 돌아오는 것, 힘들고 스트레스도 많지만 일할 수 있는 직장이 있고, 사랑하는 가족이 있고, 내 한 몸 뉘일 따뜻한 집이 있고...
감사함 없이 누렸던 일상들~
늘 곁에 있어서 행복인 줄 몰랐던 모든 것들~
가끔 어려움이 있는 것도 나쁘진 않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저런 상황에 처하면서 얻는 교훈도 많다.
이해의 폭이 넓어졌다.
사람, 참 별거 아니다.
남의 일이라고 무신경했던 일들이 언제 내 앞에 닥칠지 모른다.
잘난척하고 살아봐야 한 치 앞도 모르고...
생각도 많아지고 감사도 많아지는 날이 이어지고 있다.
물론 이 시간이 지나면 또다시 감사를 잊고 사는 배은망덕한 사람으로 돌아가게 되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