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for healing Dec 30. 2024
아주 오래전에 보았던 '헨리이야기'라는 영화가 기억난다.
신혼 때 남편과 비디오테이프로 빌려서 봤던 만큼 너무 오래전 일이라 영화의 세밀한 부분은 거의 잊혔지만 대강의 줄거리는 이랬다.
주인공 헨리는 성공한 변호사이다. 매사에 열정적이고 냉철하며 가족(부인, 딸)과의 관계도 그다지 좋지 않다.
그러던 어느 날 편의점에 들렀다가 강도에게 총상을 입고 겨우 목숨을 건졌지만 육체적, 정신적 기능이 저하되고 재활하게 되면서 이전의 삶을 돌아보게 된다. 이기적이고 대인관계에 있어서 냉정했던 자신이 이제 최약자가 되어 약자의 입장을 이해하게 되고 가족과의 관계도 회복되면서 서서히 인간미를 갖춘 사람으로 변화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스토리였다.
얼마 전에 목이 아파서 동네 병원을 찾았다가 증상의 원인에 대해 무슨 질문을 했더니 의사 선생님이 대뜸 이렇게 말했다.
"제가 설명한다고 알아들으실 것도 아니고..."
띵~~~
아니! 누가 어려운 의학용어 설명을 원했나? 단지 증상의 원인을 알고 싶었을 뿐인데... 나이 들었다고 무시하냐, 지금???
그리고 네가 설명하는 거 내가 다 알아들으면 어쩔래? 나 그렇게 무식하지 않거든?!?!?! 나 참!!!
한마디 하고 싶었지만 병원에서만큼은 의사 선생님이 '갑'이고 환자인 내가 '을'의 입장이 되어 주눅 드는 바람에 아무 말도 못 하고 돌아왔다.
집에 와서 저녁을 먹으며 그 이야기를 했더니 딸들이 분개하며(ㅋㅋ)
"아, 놔 진쫘!!!그 얘기 듣고 가만있었어? 어디 그런 싹수없는 의사가 다 있어?" 했다.
그 후부터 큰 딸은 일이 없으면 내가 어디를 가든 따라다닌다.
"누구든 우리 엄마, 아빠 무시하기만 해. 내가 그냥 확 뒤집어버릴 테니까~"
작은 딸은 바로 그 병원 홈페이지에 글을 올렸다.
'환자를 무시하고 불친절하다'라고...
잘 키운 딸하나 열아들 부럽지 않다는 말이 바로 이럴 때 쓰는 말이었다.
그런데 요즘 남편을 따라다니는 병원은 대학병원이라서 그런지 만나는 모든 직원들이 대부분 친절하다. 한마디를 해도 환자입장에서 마음 편하게 대해준다.
정작 우리를 담당할 의사 선생님은 그다지 친절하다는 느낌을 못 받았는데ㅎㅎ...
큰아이가 출근했다가 궁금해서 카톡으로
"담당의사는 뭐래?친절하게 설명해 줘?"라고 묻기에
"설명은 그런대로 해주는데... 아직 결과가 나온 게 아니니까~그리구 아주친절하지도 않고 아주 불친절하지도 않고, 우리를 잘 쳐다보지도 않아 ㅎㅎ" 했다.
그러자 딸이 대뜸
"선생님 이름이 뭐야?" 한다.
"왜? 혼내주게?ㅋㅋ" 하고 이름을 알려주었다.
병원에서 이런저런 설명을 듣고 다음 예약날짜를 잡고 돌아오니 벌써 저녁때가 다 되었다.
먼저도 이야기했지만 대학병원에 다니려면 체력부터 키워야 할 판이다.
병문안이 아니고 환자의 입장으로 찾는 병원은 심리적으로나 육체적으로 꽤나 지친다.
저녁에 온 가족이 모인 자리에서 큰아이가
"내가 아까 그 의사 선생님 검색해 봤거든? 원래 친절하지는 않은데 실력은 좋대" 한다.
"누가 그래?" 했더니
"그 병원 다녀온 환자들이 그렇게 후기를 남겼어. 그 병원에서 두 번째로 잘하는 의사래. 제일 잘한다는 선생님은 대기가 많아서 예약하기가 너무 힘들대. 우린 뭐, 실력만 괜찮으면 되지~친절한데 실력 없는 것보다 좀 불친절하지만 실력 좋은 게 낫잖아?"
그렇지~실력이 좋아서 치료만 잘해주면 되지 뭘 더 바래??
그동안 병원을 오가며 가만히 지켜보면서 의사나 간호사도 너무 힘들겠다 싶긴 했다.
말귀 못 알아듣는 사람, 똑같은 질문을 몇 번씩 하는 사람, 혼자 해결할 생각은 없이 이것저것 다 물어보는 사람에...
평상시에 제일 힘들겠다 싶었던 직업이 바로 의사, 형사였다.
의사는 늘 아픈 사람만 상대하다 보면 의사자신이 없던 병도 생길 것 같아서였고
형사는 늘 범죄자를 상대하다 보니 의심도 많아지고 마음이 조금 거칠어지진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사람은 그 입장이 되어봐야 다른 사람의 입장을 헤아릴 수 있다.
가끔은 내가 약자의 처지에 놓이는 것이 감사할 때도 있다. 아니 꼭 필요한 과정이다.
아니면 언제 내가 그런 이해와 배려의 마음을 가져보겠나 싶다.
병원마다 가득 찬 환자들을 보면 새삼스레
'참 아픈 사람도 많다'
백화점이나 마트에 가득 찬 사람들을 보면
'물가가 올랐다고 해도 살 사람들은 다 사는구나'
공항에 가득 찬 여행객들을 보면
'경제가 힘들다고 해도 돈 많은 사람은 여전히 해외여행 다니는구나' 싶다.
나는 요즘 아픈 사람들에게 모든 관심이 쏠리고 있다.
남편에게 별일 없기를 바라면서, 진심으로 아픈 이들의 마음을 헤아리고 있다.
남편은 생각이 많은 듯하다.
그동안 불편했던 허리며 두통이 혹시 암의 전이현상이 아닐까 싶기도 하고 혹시 나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 남은 식구들을 어쩌나 싶기도 한가 보다.
우리 가족이 또 어떤 가족인가?
걱정근심을 유머로 승화시키는 탁월한 유전자를 가진 사람들의 집합체 아니던가!!
아빠의 한숨의 뒤를 이어 딸들이 한 마디씩 한다.
웃기려고 할 때만 나오는 우리 집 특유의 사극조로ㅎㅎ
"아버님~이 와중에 식사를 그리 잘하시는 걸 보니 큰 병은 아닌 듯합니다"
"아무 일 없겠지만 혹시 무슨 일이 있더라도 저희 걱정은 마시고 편히 눈감으시옵소서~ 어머님이나 저희나 아버님이 생각하시는 것만큼 그렇게 나약한 생명체는 아니옵니다 "
"아버님~아직도 성깔이 살아있는 걸 보니 앞으로 몇십 년은 거뜬히 사실 듯합니다"
사실 말만 이렇게 웃기게 했지 돌아서면 아빠의 증상과 혹시 모를 암에 대해 폭풍검색에 들어가는 딸들이다.
어떤 어려움도 이쯤 되면 이겨내지 않을까 싶다.
좋아하는 찬송가구절이 생각난다.
"이 풍랑으로 인하여 더 빨리 갑니다~~~"
인생의 바다에 순풍만 있으면 좀 좋으련마는 그래도 거센 풍랑 때문에 더 빨리 나아갈 수 있다는 희망적이고 긍정적인 표현이다.
지금 우리 가족에게 꼭 필요한 마음가짐이다.
가족이 이 풍랑으로 인해 '하나 됨'을 느끼며 오늘도 힘을 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