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 말리는 야구 사랑
야구를 어쩌다가 좋아하게 되었는지는 잘 기억이 나질 않는다.
어렸을 때 오빠랑 고교야구를 보면서 오빠가 좋아하면 같이 손뼉 치고 오빠가 응원하는 팀을 아무 이유 없이 덩달아 응원하곤 했다. 그때 당시 '군산상고''광주일고''선린상고'등 몇몇 고등학교가 굉장히 잘하는 팀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야구를 보긴 했지만 경기규칙 같은 건 잘 이해를 못 해서 오빠에게 매번 물어봤지만 그때에는 그게 통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 됐었다.
예를 들어
내 눈에는 똑같이 방망이로 공을 쳤는데 어떤 선수는 살았다고 하고 어떤 선수는 죽었다고 한다던지...
한꺼번에 두 명이 죽는다던지...
어떻게 해야 쓰리 아웃이 된다는 건지...
재미있게 경기를 보는 오빠에게 자꾸 물어보면 곱게 대답해 줄 리 없었다.
결국 경기가 끝나고 오빠가 종이에 그림을 그려가며 야구의 전반적인 룰을 설명해 줬지만 도통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결국 계속 경기를 보다 보니 조금씩 이해가 되고 스스로 경기의 룰을 배워나가며 더 재미있게 야구를 볼 수 있게 되었다.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있었다.
대학 다닐 때 프로야구가 개막해서 친구랑 처음으로 야구장을 가게 되었는데 둘 다 처음이라서 어리바리하고 들뜬 마음으로 야구장을 찾았다. 응원소리도 요란하고 야구장을 가득 메운 관중들도 신기하고 넓게 펼쳐진 운동장에서 선수들을 보는 것이 너무 흥분되고 신났었다.
그날 경기는 지금은 다들 이름이 바뀌었지만 '해태타이거즈'(지금의 기아 타이거즈)와 내가 응원하던 'MBC청룡'(지금의 엘지 트윈스)의 대결이었다. 너무 신나게 경기를 보느라 주변을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청룡이 안타를 치는 순간 친구와 둘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면서 "안타! 안타!"를 외치는데 뭔가 싸한 눈길들이 느껴지더니 앞에 앉아있던 아저씨 한분이 우리에게 "청룡팬이 왜 여기 앉아있어? 야구장 처음인가 본데 청룡팬이면 저~~ 쪽으로 가요"하셨다. 그러고 나서 보니까 주위사람들이 다들 우리를 기분 나쁘게 쳐다보고 있는 게 느껴졌다. 아까 그 아저씨가 어리둥절해하는 우리에게 이번에는 친절하게 웃으며 설명해 주셨다. 야구장에는 자기가 응원하는 팀의 자리가 따로 있다는 것을... 건너편으로 옮겨가며 둘이 속삭였다."야! 우리 하마터면 해태 팬들한테 맞아 죽을 뻔했다ㅎㅎ"
그런데 하필 남편이 해태타이거즈의 열혈팬이라니!!!
다행히 엄마, 아빠의 강요(ㅎㅎ)나 권유 없이 우리 딸들은 지금의 엘지트윈스를 응원한다. 지금 생각해도 우리 애들은 왜 엘지를 응원하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이렇게 우리는 야구 경기에 있어서만큼은 3대 1로 여성시대를 누린다.
아무튼 야구중계가 있는 날이면 집안이 시끄럽다. 식구들이 모두 다혈질인 데다가 각자 응원하는 팀의 배팅하나하나에, 수비 하나하나에 함성이, 탄식이 터져 나온다.
때로는 격해져서 재미로 즐기던 야구경기가 혈압을 올리기도 하고 뒷목 잡고 쓰러지기도, 험한 말(ㅋㅋ)도 나오긴 하지만 예외가 있다.
그건 엘지와 기아가 경기하는 날이다.
상대팀과 그 팀을 응원하는 팬(아빠이거나 남편의 입장에서는 부인과 두 딸)에 대한 기본 예의를 갖추기 위해서 서로 고운 말을 쓰고 감정을 억누르며 네 식구가 거실에 쪼르르 앉아 경기를 본다.
다른 날과 달리 서로 자기가 응원하는 팀이 안타를 치거나 홈런을 쳐도, 호 수비가 나와도 흥분해서 격하게 반응하지 않는다. 남편은 아군이 없어서 홀로 외롭게 경기를 보지만 우리 세 모녀는 우리 팀이 잘하면 조용히 음소거한 채로 남편 뒤에서 하이파이브를 한다. 누가 보면 참 이상하고 웃기는 광경일 것 같다.
한 번은 큰아이가 광주에서 일이 있어서 가게 되었는데 마침 남편이 쉬는 날이어서 나들이 삼아 온 가족이 함께 광주구장을 찾아 엘지와 기아의 경기를 보았다.
아이들이 말하기를
"엄마~아무리 엄마가 엘지팬이지만 아빠 혼자 기아로 보낼 수는 없잖아 오늘은 영혼의 단짝하고 기아 쪽으로 가서 앉는 게 어때?" 했다. 듣고 보니 그런 것 같기도 해서 마음은 엘지지만 몸은 기아 좌석에 앉아 관람했다.
상상해 보시라!!!
기아 좌석에서 엘지가 점수를 냈다고 기뻐하며 환호할 수 있겠는가?
결국, 그날은 엘지가 승리했다. 속으로 터져 나오는 기쁨을 딸들과 카톡으로 나누었다. 남편은 막상 경기장에서 보니까 경기에 져도 그렇게 화가 나지는 않는 모양이었다. 심지어 날아오는 파울타구를 잡더니 어린애처럼 좋아하며 이렇게 말했다.
"경기 더럽게 못해서 기분 나빴는데 공 잡으니까 좀 나아졌네~자! 엘지 승리 기념으로 당신 가져!"
못 말리는 야구사랑!!
못 말리는 스포츠광 가족!!
우리 가족에게 모든 일은 시트콤과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