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가 낳은 감사
전에 언급한 바 있지만, 몇 년 전에 혈액순환이 잘 안 돼서 발이 붓고 너무 아파 동네 한의원에 갔더니 '사혈'이라는 걸 해야 한다고 해서 난생처음 '사혈'을 했었다. 원래 친정아버지가 정형외과 의사였었기에 한의학 쪽은 그다지 신뢰가 없었는데 ㅎㅎ주윗분들이 혈액순환에 문제가 있으면 한의원을 가보라고 하셔서 솔깃한 마음에 찾았던 한의원이었다. 그런데 사혈하고 난 후에 갑자기 그 부위에 통증이 더 심해지고 벌겋게 독을 쓰는 바람에 일반병원을 갔더니 다시 큰 병원에 가보라고 해서 대학병원까지 가게 되었다. 상처를 본 의사 선생님이 대뜸 나에게
"담배 피우세요?"라고 묻기에 안 피운다고 했더니 아무래도 '버거씨병'인 것 같다며 이 병은 담배를 많이 피우는 사람에게 많이 걸리는 병이라고 고개를 갸웃하며, 아무튼 사혈 한 부위가 궤사 되기 시작했다면서 놔두면 점점 그 부위가 퍼질 테니 예방차원에서 발가락을 절단해야 한다는 청천벽력 같은 이야기를 듣고 암울하게 수술 날짜를 잡고 기다리다가, 딸들이 열심히 인터넷으로 검색한 결과 궤사된 상처에는 거머리치료가 효과가 있다고 하여(동의보감에도 나옴ㅋㅋ) 무사히 나의 열 발가락을 지켜내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버거씨병은 아닌 것으로ㅎㅎ...
그 당시에 통증이 너무 심해서 하루 종일 발을 주물러가며 진통제를 10알씩 먹으면서 밤을 꼴딱 새우며 버텼고, 사이즈가 딱 맞는 신발을 신을 수 없어서 한 겨울에도 슬리퍼를 내 원래 사이즈보다 훨씬 큰 걸로 구입해 신고 다녔었다. 아니, 정확하게는 신고 다닌 게 아니라 거의 발에 걸치고 끌고 다녔었다. 혹시라도 신발코가 발가락에 닿으면 자지러지게 아팠기 때문이다. 그러니 걸음걸이는 늘 시원찮고 큰 신발을 걸치고 다니다 보니 제 속도로 걸을 수가 없었다. 횡단보도 신호가 바뀌는 걸 보면서도 뛰지를 못하니 답답하기 이를 데 없었고, 바지를 입으려면 바지자락이 발가락 끝에 닿을까 봐 밑에서부터 돌돌 말아 구멍을 확보ㅎㅎ하고 나서 입어야 했다. 지금이니까 웃으면서 이야기하지만 그때에는 참 고통스럽고 참담했었던 기억이다.
주변에 눈에 거슬리는 것이 많아지고 불편함을 느끼는 것이 많아지면 그만큼 나이가 들었다는 증거란다.
길을 가다 보면 어떤 사람들의 행동이 눈에 거슬려서 " 아~ 진짜 왜 저래!!!" 소리가 절로 나오곤 했다.
어린 시절부터 상처가 많았어서인지 대체적으로 꼬인 시선이 없지 않아 있었다.
운전을 하다 신호에 걸려 멈춰있을 때 창밖으로 중고등학생이나 젊은 남녀가 과한 스킨십을 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 어느새 내 입에서
"좋~~ 단~~ 다. 오래 만나봐라, 그게 얼마나 가려고~쯧" 소리가 한숨처럼 새어 나오곤 했다. 그럴 때면 아이들이 어김없이 옆에서 한 소리했다.
"엄마야말로 왜 그래? 꼰대처럼~"
모든 일에 많이 느슨해졌다.
"아~왜 저래 정말!!!"에서
"뭐, 그럴 수도 있지~"로 바뀌었다.
"좋~~ 단~~ 다"에서
"그래, 한창 좋을 때다"로 바뀌었다.
많이 너그러워졌다.
내가 어려움을 겪고 난 이후의 변화이다.
지금도 그렇다.
남편덕에 잠시 잊었던 감사가 다시 살아나고 있는 중이다.
내 남편이 암환자가 될 줄을 상상 못 했었기에 요즘은 주변 아픈 이들에게 더 많이 관심을 갖게 되었고 그들을 위한 진심 어린 기도를 하고 있다.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확실히 달라졌다.
내가 누리고 있는 평범한 일상이 더 이상 평범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 나니까 주변의 모든 것이 새롭게 느껴진다.
가을 추석연휴로 계획했던 성지순례일정은 아무래도 남편의 컨디션 상, 무리일 것 같아서 무기한 연기하기로 했다. 사실 우리 나이를 생각하면 다시 기회가 올 거라는 기대는 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
'여행은 다리가 떨릴 때가 아니라 가슴이 떨릴 때 하라'
뭐가 됐든 기회라는 건 올 때 잡아야 한다는 옛말들이 새삼 마음에 와닿는다.
오죽하면 기회의 신에게는 앞머리밖에 없다고 하지 않았나.. 기회는 지나가면 잡을 수가 없기 때문에 뒤통수는 대머리라고...
요즘에는 하루하루를 열심히 살려고 노력 중이다. 그래서 암묵적으로 몇 가지를 정해보았다.
*건강할 때 교회봉사 더 많이 하기
*되도록 가족들과 많은 시간 보내기
*좋은 추억거리 하나라도 더 만들기
*사진첩 정리하기
*필요 없는 잡동사니 버리기
*늦었지만 운동 시작하기... 등등
그러고 보면 지금 나에게 일어난 안 좋은 일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
"내게 고난당한 것이 유익이라"
"이 또한 지나가리라"
내게 기댈 신앙이 있어서 감사하다.
함께 울어주고 웃어 줄 친구들이 있어서 감사하다.
돌아갈 집과 사랑하는 가족이 있어서 감사하다.
그럼에도 남편이 계속 일할 수 있음에 감사하다.
모든 것이 감사하다...
?????
그런데 솔직히 말하자면 아직도 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욱" 이 불쑥불쑥 올라온다.
때로는 내가 나 자신에게 실망할 정도로 별거 아닌 일에 분노가 일기도 한다.
"이래도 감사하냐?" 며 내 속의 내가 나를 비웃는다.
오늘도 나를 비웃는 내 안의 또 다른 나와 싸우며 억지로, 정말 필사적으로 감사를 쌓아간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너무나 무감각하고 무정한 마귀할멈 같은 할머니로 늙어갈 것 같아서이다.
감사해서 감사한 것이 아니라 감사하기 위해서 감사하려고 애쓴다.
모든 것이 감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