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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판 Nov 12. 2022

가난한 예술가(혹은 예술가 지망생)의 초상

서머싯 몸의 <인간의 굴레에서> 작품 속 등장인물의 삶 들여다보기

서머싯 몸의 소설 <인간의 굴레에서>에는 여러 명의 예술가가 등장한다. 그중 화가로서의 성공을 꿈꾸던 주인공 필립이 자신의 진로를 변경하는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네 사람의 등장인물을 살펴보면서, 가난한 예술가로 살아간다는 것, 재능과 열정 사이 간극의 딜레마 등을 생각해보고자 한다.


크론쇼- 술주정뱅이 혹은 가난한 낭만 시인


크론쇼는 필립이 파리에서 어울리게 된 화가 지망생 몇 명이 숭배하는 시인이다. 그는 여러 편의 시를 발표했지만  유명세를 떨쳐서 시집을 내고 돈을 벌 정도로 뛰어난 시인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의 현란한 화법과 잡다한 지식들, 또 명사들을 여럿 알고 있다는 점은 화가로 성공하기를 꿈꾸는 청년들에게 무척 매력적으로 여겨졌다. 필립의 친구들은 크론쇼에게 들은 이야기를 자신의 생각처럼, 신념처럼 늘어놓기를 좋아했다. 크론쇼는 매일 어느 술집의 구석진 자리에 앉아서 밤부터 새벽까지 머물곤 하였는데, 술에 취하면 말이 많아지면서 예술과 인생에 대한 자신의 생각들을 술술 늘어놓았다. 필립도 그에게 매료되었다.

크론쇼가 죽을 때까지 마신 술, 압생트

반면, 크론쇼는 몹시 가난해서 술값을 아끼기 위해 술을 병으로 사서 술집에 맡겨놓고 조금씩 나눠마셨고, 아내와 아기는 부두의 허름하기 짝이 없는 조그만 아파트에서 더럽고 지저분한 살림을 하고 있었다. 그의 아내는 음란하고 험한 말씨를 갖고 있었으며 그를 등쳐먹는다는 소문까지 있었다. 그는 필립에게 예술과 인생에 대해 아래와 같이 인상적인 말들을 한다.


" 자네가 여기 뭐 하러 왔는지 난 모르네. 내가 알 바도 아니고. 하지만 예술이란 일종의 사치야. 인간이 가장 중요시하는 것은 자기 보존과 종족 번식이지. 이 본능이 충족될 때라야만 인간은 작가나 화가, 시인이 제공해 주는 오락에 빠질 수 있는 거지."


" 자네도 나이가 들면 알게 될 거야. 세상을 살 만한 장소로 만들기 위해 무엇보다도 우선 필요한 일은 인간의 불가피한 이기성을 인정하는 것이라는 것을. 자넨 타인에게 이기적이 아니기를 요구하는데 그건 자네의 욕망을 위해 타인더러 자신의 욕망을 희생하라고 하는 모순된 주장이야. 타인이 왜 그래야 하나. 모든 개인이 세상에 살면서 자기 자신을 위한다는 사실을 자네가 받아들여야 자넨 다른 사람들에게 덜 요구할 수 있어. 다른 사람들에게 덜 실망할 거고, 다른 사람들을 더 자비롭게 바라볼 수 있어. 사람은 인생에서 단 한 가지를 추구하지. 그건 자기 자신의 쾌락이야."


프와레 - 학생들 미술지도로 먹고사는 이류 화가


프와레는 필립이 다니는 미술학원에 일주일에 한 번씩 들러 학생들 그림을 봐주는 화가다. 젊은 시절에는 장래가 촉망되는 화가였으나 최초의 성공 이후 20여 년 동안 전혀 새로운 것을 내놓지 못했다. 그는 타인의 성공을 몹시 부러워했고 특히 인상파 화가들을 비난했다. 그는 학생들의 작품을 노골적으로 경멸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논할 가치도 없어 보이는 그림은 아예 무시하고 봐주지 않았다. 이 때문에 그가 오는 날은 상처받는 게 두려워 아예 학원에 나오지 않는 학생도 있었다. 그래도 선생으로서는 최고였기 때문에 대부분의 학생들은 그의 폭언을 감수했다. 화가를 인생 목표로 삼은 프라이스 양은 그가 봐주지 않는다고 항의했다가 그에게 지독한 폭언을 듣는다.


페니 프라이스 - 열정만으로 가난과 재능 결핍이겨보려다 비극적으로 생을 마치는 화가 지망생


이 여성의 삶은 지독하게 가난한 데다 재능마저 없는 사람이 열정만으로 예술가의 삶을 살려고 하는 것이 얼마나 무모한 일인지를 극단적으로 보여준다. 그녀가 선생 프와레에게 자신의 그림을 평가받았을 때, 선생이 차라리 낙타를 가르치는 게 낫겠다고 혹평을 하자, 자신은 화가로 먹고살 거라고 당당하게 말한다. 프와레는 그녀가 재능뿐만 아니라 눈꼽만치의 적성도 없으니 차라리 가정부로 먹고사는 게 낫다고 하면서 조목조목 그녀의 그림을 비판하는데, 페니 프라이스는 오히려 자신의 재능을 알아봐 주지 않는 것에 분노한다. 필립은 나중에 그녀의 더럽기 짝이 없는 집에 가서 그녀의 그림을 봐주는데, 제대로 그린 그림이 하나도 없는 것을 보고 안타까워한다.


게다가 그녀는 성격적인 결함마저 갖고 있어서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했고, 찢어지게 가난함에도 불구하고 생계를 유지하기 위한 대책을 마련할 생각을 전혀 안 하고 지내다가 거의 굶어 죽고 만다. 그녀가 필립을 좋아한 것도 그가 절름발이라는 핸디캡이 있는 것이 오히려 위안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었더라면, 혹은 최소한으로 돌봐줄 가족이라도 있었더라면 인생이 그토록 비참하게 끝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녀가 죽은 뒤 장례를 치르러 온 친오빠의 태도를 보면 그녀가 가족에게마저도 사랑받지 못한 존재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어쩌면 그녀에게 그림은 비참한 인생에서 살아갈 힘이 되어주는 마지막 방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녀를 무너뜨린 것은 늘지 않는 그림 실력이 아니라 빈곤이었다. 가난은 그토록 무서운 것이었다. 그녀는 거의 매일을 빵 한 조각과 우유 한 병으로 버티다가 그것도 안되니까 거의 굶다시피 하는 생활을 했다. 필립이 식사를  한 번 사준 적이 있었는데, 그녀가 아귀같이 게걸스럽게 먹는 모습에 그는 충격을 받았다. 옷도 늘 똑같은 더럽기 짝이 없는 옷을 입었고, 치마의 뜯어진 곳도 깁지 않았다. 그녀는 화가가 되겠다는 욕망에 눈이 멀어 현실은 안중에도 없었던 것이다. 이 길을 포기하느니 차라리 죽어버리겠다는 결의를 가진 그녀는 죽음밖에 선택지가 없었던 듯하다.


미겔 아후리아 - 스페인에서 온 가난한 소설가 지망생


이 청년은 필립이 자신의 그림 모델을 부탁해서 알고 지낸 소설가 지망생인데, 무일푼이어서 닥치는 대로 일을 하며 글쓰기를 하는 사람이었다. 필립은 그가 쓴 소설 원고 일부를 읽고 그것이 형편없어서 안타까워한다. 예술을 위해 인생의 온갖 쾌락을 거부하는 그의 열정과 노력은 가히 영웅적이었다. 그런데 그는 스페인 사람이면서도 파리의 이야기만 쓰고 싶어 했다. 프랑스와 파리의 지성만을 숭배했다. 정신은 하찮기 짝이 없었고 삶에서도 너무 뻔한 것밖에 보지 못했다. 필립이 보기에 그는 훌륭한 작가의 자질은 있었지만 재능이 없었다.  그의 노력은 공연한 시간낭비처럼 보였다. 성취욕과 자신감만으로는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필립은 이 사람과 페니 프라이스를 보고 깨닫는다.




필립은 이들의 삶을 보면서 화가가 되겠다고 시간과 돈과 노력을 바치는 것이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인지 , 자기에게 일류 화가가 될만한 재능이 있는지 깊은 고민에 빠진다. 본문에서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그는 머리로 그림을 그렸다. 가치 있는 그림은 마음으로 그린 것뿐임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가진 돈도 별로 없었다. 고작 천육백 파운드뿐이었다. 극도로 절약하지 않으면 안 될 처지였다. 앞으로 십 년 동안은 돈 벌 가망이 없다. 하기야 그림의 역사를 돌아보면 한 푼도 벌지 못한 화가들이 숱했다. 가난을 각오할 수밖에 없다. 물론 불멸의 걸작이라도 남기게 되면 가난도 가치가 있다. 하지만 필립은 자기가 이류 이상은 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끔찍한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 이류가 되기 위해 젊음을, 삶의 즐거움을, 그리고 많은 가능성을 포기할 가치가 있는 것일까? 필립은 파리에 사는 외국인 화가들의 생활을 익히 보아왔다. 그들의 삶이 몹시 편협하고 인습적임을 알 수 있었다. 명성을 쫓아 이십 년 동안이나 허덕이며 살다가 끝내 명성을 얻지 못한 채 더러운 생활과 술에 찌들어 살게 된 사람도 있었다. 패니가 자살하자 이전에 들었던 어떤 이야기가 떠오르기도 했다. 절망에서 도망쳐 보려고 끔찍한 짓을 저지른 사람들의 이야기였다. 프와네 선생이 패니에게 했던 경멸 조의 충고가 떠올랐다. 충고를 받아들여 부질없는 시도를 단념하였더라면 좋지 않았을까.


필립은 결심을 굳히기에 앞서 크론쇼와 프와레에게 진지하게 묻는다. 이류 화가가 되느니 차라리 집어치우고 싶다고.


크론쇼는 "여기서 빠져나갈 수만 있다면, 시간이 있을 때 그렇게 하게."라고 말하며 독한 술병과 탁자 위에 쌓여있는 접시들과 비참한 자신의 모습을 통해 실패한 삶의 비극적인 단면을 보여준다.


프와레는 필립의 집을 방문하여 그림을 봐주면서 좀 더 진지한 조언을 한다.


「세상에 가장 굴욕스러운 일은 말이지, 먹고사는 걱정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일이야. 난 돈을 멸시하는 사람들을 보면 경멸감밖에 들지 않네. 그런 자들은 위선자가 아니면 바보야. 돈이란 제 육감과 같아. 그게 없이는 다른 오감을 제대로 사용할 수가 없지. 적정한 수입이 없으면 인생의 가능성 가운데 절반은 막혀버리네. 딱 한 가지 조심해야 할 것은 한 푼 벌면 한 푼 이상 쓰지 않아야 한다는 거야. 예술가에겐 가난이 제일 좋은 채찍이 된다는 말들을 하잖나.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은 가난의 쓰라림을 직접 겪어보지 못해서 그래. 가난이 사람을 얼마나 천하게 만드는지 몰라. 사람을 끝없이 비굴하게 만드네. 사람의 날개를 꺾어버리고, 암처럼 사람의 영혼을 좀먹어 들어가지. 부자가 되어야 한다는 건 아니야. 하지만 적어도 품위를 유지할 수 있는 정도, 방해받지 않고 일을 할 수 있고, 너그럽고 솔직할 수 있을 정도, 그리고 독립적으로 살 수 있을 정도는 있어야지. 나는 말이야, 글을 쓰건 그림을 그리건 예술하는 사람이 먹고사는 일을 자기 예술에만 의존한다면 그런 사람을 정말 가련하게 보네」

-중략-

「자네가 내 충고를 바란다면 말일세, 이렇게 말하고 싶네. 용기를 내어 딴 일에 운을 걸어보라고 말일세. 가혹하게 들릴지 모르겠네만 들려주고 싶은 말은 이거네. 내가 자네 나이 때 누가 내게 그런 충고를 해주었다면, 그리고 내가 그 충고를 받아들였다면 정말 얼마나 좋았을까 싶네」

필립은 놀라 그를 쳐다보았다. 프와네는 억지로 입가에 웃음을 띠었지만 눈빛은 여전히 심각하고 서글퍼 보였다.

「때가 너무 늦은 뒤에 자신의 범용을 발견한다는 건 끔찍한 일이야. 그렇다고 인격 수양이 되는 것도 아니고」


프와레는 화가로서의 성공이 최초의 성공을 넘어서지 못하고 지지부진하게 살았지만 그런 현실을 받아들이고 어떻게든 안정적인 생활을 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하면서 일상을 영위해 나간다. 그런 면에서 그는 현실의 절망감을 잘 극복하며  셈이다. 그에 비해 크론쇼는 죽을병에 걸려 런던에서 필립의 집 방을 얻어 살다가 쓸쓸한 죽음을 맞이한다.



 만일 이런 상황에 놓이게 된다면 필립처럼 더 늦기 전에 진로를 바꾸는 것이 나은 것일까, 아니면 힘들더라도 끝까지 자신의 의지를 밀고 나가는 것이 옳은 것일까?

쫓을 것이냐 말 것이냐, 그것이 문제로다. 오일파스텔 산 기념으로 한번 그려봄^^

나의 결론은 '정답은 정해져 있지 않다'는 것이다. 크론쇼가 말한 것처럼 자기 자신의 쾌락을 위해 스스로 선택을 하고 그 길을 는 것이며, 결과가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지나고서야 알 수 있다. 다만 가난이 걸림돌이 될 때는 그것을 극복하기가 너무 어렵다는 것, 재능이 전혀 받쳐주지 않을 때는 절망밖에 얻을 수 없다는 것이다.


프와레가 청년시절 최초의 성공을 이루어냈을 때 그가 중년의 나이를 훌쩍 넘을 때까지 더 이상의 예술적 성취를 이뤄낼 수 없을 것이라고 상상이나 했을까. 자신으로써는 노력을 했는데도 지나고 보니 성취를 못했던 것이다. 젊은 시절 그가 필립에게 하듯 누군가가 조언을 했더라면 그가 그 조언을 들었을까? 절대 듣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러기엔 그의 첫 번째 성공이 너무 달콤했을 테고 미래의 성취를 확신했을 테니까.


필립이 화가로서의 길을 포기한 것은 이류 화가가 될 것이 두려워서 때문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는 예술가의 삶을 살기에는 너무 이성적이었고, 삶의 여러 가지 모습들을 즐기고 싶어 했으며, 중산층으로서 누리는 삶을 더 원했기 때문이었다. 가난은 그토록 극복하기 어려운 난제이다. 또한 가난하면서 재능도 부족한 사람이 예술가를 꿈꿀 때는 포기해야 할 것들이 너무 많다.




나 자신이 20대에 이와 비슷한 경험을 다. 꿈을 이룬다는 명목으로 첫 번째 직장은 호기롭게 버렸지만, 벌었던 돈을 다 써버렸을 때, 수입이 없는 데서 오는 불안감을 극복할 수 없었다. 최선이 안 될 때는 차선이라도 선택해야 한다고 합리화하며, 필립이 그랬듯 방향을 틀고 말았다. 두 번째 직장을 얻기 위한 공부를 할 때는 엄마가 돈을 대주어야 했다. 직장을 다니면서도 어느 정도는 원하는 것을 이루어낼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그러기에 나의 에너지는 너무 모자랐고, 나는 직장생활과 가정생활에 쫓겨 살아가야 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아쉬움이 남는 시간들이었지만, 그 시절의 선택을 후회하지는 않는다. 준비가 너무 안 된 상태에서 의욕만 가지고서는 안된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물론 과감하게 도전해본 것에 대해서는 나 자신이 자랑스럽기도 하다.

이루지 못한 꿈이 있을 때는 그 꿈이 두고두고 미련으로 남게 마련이다. 지금은 거창하게 꿈을 이루려 하기보다는 즐기는 것에 의미를 두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 선택은 스스로 하는 것이다. 그 결과 인생이 주는 시련은 나의 몫이다. 그 시련이 나를 너무너무 견디기 힘들게 할 때, 그럴 때는 꿈보다는 내 삶을 먼저 선택하는 것이 다.



청색 본문 출처: <인간의 굴레에서 1>, 서머싯 몸/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1/송무 옮김/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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