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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판 Nov 16. 2022

불행을 선택한 여성들(블란치 스트로브 &밀드레드)

서머싯 몸의 소설 속 여성의 삶 들여다보기

서머싯 몸의 소설[달과 6펜스]에서 강렬한 인상을 남겼던 블란치 스트로브, 작가의 또 다른 소설 [인간의 굴레에서] 에서 여주인공이라 할 만큼 주인공의 삶을 쥐고 흔들었던 밀드레드의 삶을 생각해보려고 한다. 가장 불행한 여성의 전형을 보여주는 듯한 두 여성의 삶은 많이 다르지만 어딘가 닮은 구석이 있다. 같은 작가의 작품이어서 그런 것일까. 이들의 행적은 소설을 흥미진진하게 읽을 수 있게 하면서도, 단맛이 없는 초콜릿처럼 씁쓸한 기분이 들게 한다.


블란치 스트로브- 불꽃을 잡으려다 타버린 인생


그녀를 바라본 남자 - 더크 스트로브


블란치 스트로브는 어느 로마 왕족 집안의 가정교사로 들어갔다. 그녀는 그 집의 아들에게 유혹당해 임신을 하고 말았고, 길거리로 쫓겨난다. 죽어버리려고 했던 그녀를 돌봐주었던 이가 더크 스트로브였다. 그는 땅딸막한 외모에 친구들에게 실없다고 놀림이나 받는, 남성으로서는 참 매력이 없는 사람이었지만 심성이 착했고 그녀를 여신처럼 숭배해주었기에 그의 사랑을 받아들이고 그의 아내가 된다. 두 사람은 부유하지는 않았지만 안락한 가정을 꾸리며 행복한 생활을 한다. 더크 스트로브는 사람들이 돈을 빌려달라 하면 마다하지 않았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있으면 기꺼이 도움을 주었다. 그림도 곧잘 그렸는데 잘 팔리기는 해도 썩 예술적인 그림은 못되었다. 남편 더크는 어릿광대 같은 사람이었지만, 그녀는 그의 부인으로 사는 것에 만족했다. 문제는 그의 오지랖이 지나치다는 것. 그는 그녀의 극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죽어가고 있던 찰스 스트릭랜드를 자기 집으로 데려와 돌봐주고 그녀에게도 돌봐주도록 강요한다. 이것이 더크와 블란치 부부의 불행의 시작이 될 줄을 남편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고, 아내는 본능적인 감각이 깨닫고 있었기에 끝까지 찰스 스트릭랜드를 데려오는 것을 거부한 것이었다.

그녀가 바라본 남자 - 찰스 스트릭랜드 


블란치는 찰스 스트릭랜드와 엮이고 싶지 않았다. 그는 야수 같은 남자였다. 그는 블란치의 남편 더크 스트로브를 놀려먹기 일쑤였고, 돈을 빌리러 와서도 더크의 그림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좋은 소리를 하지 않을 만큼 더크를 무시하는 남자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크 스트로브는 그의 화가로서의 천재성을 높이 평가하여 블란치에게 그가 자신에 비해 위대한 화가임을 말하곤 했다. 그의 외모 또한 더크와 달리 큰 체구에 붉은 수염이 있는 매우 남성적인 모습이어서 블란치는 그를 대하는 것이 몹시 불편했다.  

 더크가 죽어가는 그를 집으로 데려와 돌봐주겠다는 뜻을 굽히지 않자, 그녀는 눈물을 흘리면서 그 사람이 오면 자신이 나가겠다는 말까지 한다. 그런데도 더크가 계속 강요하자


"…… 딴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좋아요. 도둑이든 술꾼이든 길거리의 비렁뱅이든 상관없어요. 무슨 일이든 기꺼이 하겠다고 약속할게요. 하지만 제발 스트릭랜드만은 데려오지 마세요."

"그 사람은 무서워요.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 사람한테는 무서운 데가 있어요. 우리에게 큰 해를 끼칠 사람 같아요. 전 알아요. 느낌이 그래요. 그 사람을 데려오면, 반드시 끝이 좋지 않을 거예요."


그녀는 공포감을 느끼고 자신의 운명을 걸고 스트릭랜드를 데려오는 것을 반대한다. 하지만 그토록 간절히 애원했음에도 불구하고 남편이 과거에 자신이 그녀를 구해 돌봐주었던 사실까지 들먹이면서 찰스를 돕기를 요구하자, 그녀의 태도는 급변하여 스트릭랜드를 데려오는 것에 동의한다. 이때가 그녀에게는 '운명이 원하는 길의 끝에 무엇이 놓여있든 그 길을 가겠다'는 결심을 굳힌 시점이었고, 더크 스트로브에게는 아내의 마음을 잃어버린 시점이었다.




블란치의 선택 - 운명이 이끄는 대로


그 후 그녀의 인생은 운명에 따르는 것이었다. 죽어가는 찰스 스트릭랜드는 더크 스트로브와 블란치 스트로브의 극진한 보살핌으로 서서히 몸을 회복해나갔다. 찰스의 몸이 회복되어감에 따라 블란치의 찰스를 향한 마음은 점점  커져갔다. 그의 옷을 갈아입히고, 몸을 씻기고, 밥을 먹이고, 밤새 그의 곁에 앉아 그를 바라보았다. 그를 혐오하던 감정은 그를 원하는 감정이 되었다. 남편의 손길이 싫었고, 남편과 셋이서 함께 있는 시간이 싫어졌다. 찰스도 그녀를 바라보기 시작했고 그녀가 그를 원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어느 날 그녀는 찰스 스트릭랜드의 여자가 되었다. 더크 스트로브도 살짝 둘의 관계를 눈치챈 듯 보였으나 그녀는 신경 쓰지 않았다. 더크 스트로브는 더 이상 그녀의 마음을 차지한 남자가 아니었다.


무언가 잘못되어간다는 것을 깨달은 더크 스트로브가 찰스 스트릭랜드에게 몸이 회복되었으니 나가 달라고 했을 때, 블란치는 찰스를 따라가겠다고 선언했다. 더크가 충격을 받아 그녀를 달래면서 찰스는 결코 그녀를 행복하게 해 줄 수 없다고 말렸지만 그녀는 마음을 돌리지 않았다. 바보 같은 더크가 차라리 자신이 나가겠다며 두 사람이 그의 집에서 그냥 지내라고 했을 때도 그녀는 살짝 놀라기는 했지만 거절하지는 않았다. 찰스 스트릭랜드가 얼마나 가난하고 구차하게 살고 있는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더크 스트로브는 이후에도 그녀가 지나는 길목마다 기다려 그녀에게 무릎 꿇고 애원하고, 편지를 보냈으며 언제든 도움이 필요하면 연락하라는 등 그녀에게 변함없는 사랑이 있는 것처럼 대했다. 그녀는 그럴수록 더크 스트로브에 대한 혐오감만 생겼다. 그녀의 강한 거부에도 불구하고 찰스 스트릭랜드를 데려왔을 때, 더크 스트로브를 향한 그녀의 마음은 완전히 떠나버렸기 때문이다.


찰스 스트릭랜드와 지낸 몇 달간 그녀는 그의 누드모델이 되어주었고, 그와 뜨거운 사랑을 나누었다. 하지만 찰스 스트릭랜드는 잡고 싶다고 잡을 수 있는 남자가 아니었다. 누드화를 그린 뒤에는 시큰둥하게 그녀를 대했고, 블란치가 그와 정식 부부 같은 관계가 되기를 원하고 자신을 그녀의 뜻대로 움직이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알았을 때 찰스 스트릭랜드는 그녀만 남겨두고 떠나버렸다. 찰스 스트릭랜드의 여자에 대한 열정은 불꽃처럼 쉽게 사그라드는 것이었다. 그에게 여성이란 필요를 채우기 위한 존재에 불과했다. 반면 블란치에게 그는 운명의 남자였고, 평생을 함께 하고 싶은 남자였으며, 소유하고 싶은 남자였다. 그녀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자신의 욕망에도 불구하고 그를 가질 수는 없다는 것을.


찰스 스트릭랜드가 떠난 뒤 홀로 남겨진 블란치에게는 무슨 일이든 해줄 각오를 하고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더크 스트로브가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더크 스트로브에게 돌아가지 않았다. 더크 스트로브와 함께 하는 시간은 그녀에게 아무 의미가 없었다. 그녀의 선택은 죽음이었다. 수산이라는 독극물이 그녀의 마지막 선택을 도와주었는데, 즉시 죽지는 못하고 일주일이 넘게 입원을 하게 됨으로써 그녀는 몸의 엄청난 고통뿐만 아니라 영혼의 고통도 겪어야만 했다. 그녀가 죽어가는 시간에 곁에 있어준 것은 더크 스트로브였다. 그녀의 장례식까지도. 그녀는 죽어가면서도 끝까지 더크를 만나려 하지 않았다.

      



블란치 스트로브의 이야기를 다 읽고났을 때 몹시 복잡한 심정이 들었다.

일단은 찰스 스트릭랜드라는 사람에게 강한 분노심이 일었다. 어떤 이유를 갖다 대더라도 그가 생명을 구해준 은인의 아내를 빼앗았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는 것이니 그는 죽을 짓을 한 셈이었다. 그래서 주인공의 모델이 되었던 폴 고갱의 일대기를 살펴보았다. 혹시 그도 이런 파렴치한 짓을 한 전력이 있다면 그의 그림을 좋게 보는 마음을 갖지 않으려고. (좀 어이없는 흥분이긴 했지만)

그리고 더크 스트로브의 행동도 정말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토록 아내가 거부하는데, 자신의 공명심을 충족시키기 위해 그렇게까지 했어야 했을까. 분명 다른 방법이 있었다. 블란치의 말처럼 혼자서 찰스의 집에 머물면서 그를 돌보던가, 아니면 병원에 입원시켜 돌보던가. 아내에게 딴 남자의 몸을 그토록 극진히 돌보게 하는 것은 상식적으로도 이해하기 힘든 일이다. 일이 벌어지려다 보니 분별력을 잃어버리고 그렇게까지 한 것이겠지만, 더크 스트로브는 자신의 헌신으로 위대한 예술가를 살리는 대신 사랑하는 아내를 잃어버렸다.

 찰스 스트릭랜드는 그녀가 죽은 것은 자신의 탓이 아니라며 그녀 자신이 불완전한 존재였기 때문에 그리 된 것이라고 나중에 변명을 한다. 어쩌면 그의 말이 맞는지도 모른다. 어떤 상황에서도 최종 선택은 스스로 하는 것이니. 그녀에게는 더크 스트로브가 아니라도 분명히 다른 선택지가 있었을 것이다. 그녀는 죽음이 아니라면 남편에게 돌아가는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 운명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는지도 모르겠다.





밀드레드 - 허영심과 탐욕에 찌든 싸구려 인생



그녀를 바라본 남자 - 필립 케어리


밀드레드는 주인공 필립이 의학공부를 하러 런던에 머물던 7년의 기간 동안 그의 삶에 엄청난 영향을 끼치면서 그를 괴롭히고 그에게 상처를 주는 여성이다.


카페 종업원이었던 밀드레드가 남자를 고르는 기준은 매력 있는 외모와 돈이었다. 그녀는 분명 하층민 출신이고 숙모의 집에 얹혀사는 신세였지만, 자신을 부유한 중산층의 여성처럼 보이고 싶어 했기 때문에 그녀가 하는 말들 중의 대부분은 꾸며낸 이야기와 실제 이야기가 교묘하게 섞여있었다. 그녀는 필요하면 거짓말을 밥먹듯이 할 수 었다.

그런 그녀에게 필립이라는 청년은 가난한 의학교 학생에다가 절름발이라는 핸디캡까지 있는 남자여서 그녀는 그를 무시했다. 그녀의 마음은 온통 다른 남자에게 가 있었다.

필립은 처음에는 종업원이었던 그녀가 자신을 경멸하는 듯 보이자 자존심이 상해  그녀를 망신 줌으로써 복수하고 싶은 마음으로 카페에 매일 갔다. 밀드레드는 콧수염이 있고 돈이 있어 보이는 독일 남자 앞에서만 웃어대고 잘 보이려고 하였는데 그 모습을 경멸하면서도 필립은 차츰 그녀에게 빠져들었다. 그녀는 필립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애인상과는 거리가 멀었다. 하지만 필립은 그녀의 경멸하는 듯한 태도에 더욱 오기가 발동했고 그것이 사랑의 감정이 되고 말았다. 돈 없는 의학생으로 생각하고 무시하던 필립을 그녀가 관심 갖게 된 계기는 필립이 무심코 그려놓고 간 그림 때문이었다. 그녀는 자신을 그린 그림이 무척 마음에 들었던 듯 필립에게 다정하게 말을 걸어왔다. 필립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그녀에게 데이트를 신청했고 그녀는 허락했다. 그녀의 말과 행동은 천박했다. 그녀는 타인에 대해 거의 험담만 늘어놓았고, 거짓으로 자신을 포장했으며, 필립이 제공한 선물의 가치만큼 그에게 잘 대해주었다. 그녀는 거의 모든 물건의 값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필립은 그녀의 속물근성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그녀에게 돈을 쓰는 것을 아깝게 생각하지 않았고, 혼자 있을 때도 그녀 생각을 하면서 어떻게 하면 그녀를 차지할 수 있을지 고민했다. 그녀의 출근길을 예고도 없이 동행해서 그녀를 당황시키기도 했고, 그녀가 다른 남자를 만날 때는 몰래 숨어서 지켜보다가 들켜서 망신을 당하기도 했다. 필립은 밀드레드를 경멸하는 마음과 차지하고 싶은 마음 사이에서 자주 갈등했다. 그녀가 파리에 가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안 필립은 비용이 크게 부담되는 것을 알면서도 그녀에게 파리 여행을 제안하는데, 그녀는 결혼하지 않은 남성과 여행을 가지는 않겠다고 한다. 고민을 하던 필립은 그녀에게 청혼하는데, 이것 또한 그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아니었다. 필립은 그녀가 자신의 결혼상대가 될 수 없다고 이성적으로는 생각하면서도 그녀를 차지하기 위해 결혼을 해야 한다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밀드레드는 이것저것 따져보더니 결혼하고서도 형편이 달라질 것이 없다면 결혼하지 않겠다고 했다. 그녀가 필립을 만나주는 때는 그에게 선물을 받거나 그가 맛있는 것을 사주고 공연을 보여주는 등 혜택을 제공할 때뿐이었다. 필립은 그녀의 몸을 차지하고 싶은 욕망을 강하게 느낀다.


그녀가 바라본 남자들


밀드레드는 필립이 자신을 좋아하고 있다는 것, 자신을 위해서는 무엇이든 할 각오가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를  선택하지 않는다. 그에게 필립은 가난한 의학생이었고, 너무 신사적이어서 대화를 나누기가 지루한 사람이었다. 그녀와 필립은 관심사가 많이 달랐다. 게다가 그녀가 가장 거부감을 느낀 것은 그가 절름발이라는 것이었다. 마치 야생동물 암컷이 수컷을 선택할 때 힘이 세고 유전자가 좋아 보이는 대상을 선택하듯, 밀드레드는 건강한 체격에 잘생기고 돈도 많고 성적 매력이 있는 사람을 좋아했다. 때문에 그가 절름발이여서 보여줄 수밖에 없는 기이한 모습을 그녀가 달가워하지 않는 것은 당연했다.


그녀가 선택한 첫 번째 남자는 밀러라는 독일 남자였다. 밀러가 카페에 올 때마다 밀드레드는 그에게 적극적으로 대했고 그의 말에 자주 웃었으며 그를 부유한 독신남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가 청혼했을 때 기꺼이 그 청혼을 받아들이고 필립은 헌신짝처럼 버릴 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밀러의 아이를 임신하고 나서 밀러에게 버림받는다. 밀러는 유부남이었고 부유한 남자도 아니었다. 단지 그녀를 정부로 삼기 위해 접근한 것이었다. 임신한 채로 갈 곳이 없던 밀드레드는 필립을 찾아가 도움을 청한다. 필립은 그녀에게 언제든 찾아가 기댈 수는 있지만 사랑하지는 않은 그런 남자였다. 필립은 버림받은 그녀를 기꺼이 도와주었다. 지낼 곳을 마련해주고, 살아가는데 필요한 돈을 대주었으며 나중에 아이가 태어나자 아이를 몹시 사랑해주었다. 남편으로써 필립만 한 사람이 없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녀는 필립과 잘 지내보기로, 그의 여자가 되어보기로 거의 결심하는 듯했다.


하지만 필립과 친하게 지내던 잘 생기고 유쾌해서 사람들을 사로잡을 줄 아는 그리피스라는 남성이 나타났을 때 밀드레드는 다시 한번 필립을 매정하게 버린다. 그리피스는 바람둥이답게 필립이 그녀를 얼마나 좋아하는지를 알면서도 밀드레드를 차지해서 필립에게 상처를 준다. 문제는 그리피스와 밀드레드 둘 다 가진 돈이 없다는 것이었다. 밀드레드는 염치없게도 살아가는데 필요한 돈을 필립에게 달라고 한다. 그리피스와 함께 떠날 여행 경비까지. 이 부분은 정말 기가 막힌 상황이었는데, 필립은 자신의 괴로움이 극대화되는 것을 감수하며 이들의 여행경비까지 대주고 만다. 밀드레드는 필립의 관대함이 어이가 없으면서도 그리피스에 대한 열정이 너무 강해서 필립의 마음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그녀는 아주 강렬하게 그리피스에게 빠져들었다.

그녀가 이렇게까지 함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던 필립을 완전히 떠난 밀드레드는 그리피스에게 매달리다가 매몰차게 버림받고 만다.


그 뒤 얼마간 시간이 흐른 뒤 필립이 길거리에서 우연히 밀드레드를 발견했을 때 그녀는 매춘으로 밥벌이를 해가며 아이와 함께 살고 있었다. 필립은 그녀가 그에게 했던 그 많은 짓들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처지를 안타까워하며 자기 집 가정부로 들어와 살 수 있게 배려해준다. 밀드레드는 필립이 이렇게까지 했을 때는 자신을 아직도 사랑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필립이 어디까지나 고용관계일 뿐이라고 했지만 믿지 않았다. 필립은 함께 밥을 먹었고, 필요한 것들을 사주었으며 그녀가 음식을 못해도 뭐라 하지 않았고, 함께 여행을 다녀오기도 했다. 다만 그녀와는 여행에서도 같은 방을 쓰려고 하지 않았다. 밀드레드는 이젠 정말 필립과 다시 잘해볼 생각이었다. 그래서 주변 사람이나 만나는 사람들에게 필립과 부부 사이인 것처럼 거짓말을 하곤 했다. 밀드레드는 처음에는 그가 자기와 관계를 맺기를 원한다고 생각해 매춘을 할 때 입었던 야한 옷과 야한 화장을 하고 그를 유혹했는데, 그는 그녀의 치장에 오히려 거부감을 느끼는 듯 매몰차게 거절했다. 그 뒤에도 여러 차례 유혹했지만 넘어오지 않았다. 밀드레드는 필립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토록 자신에게 매달리고 사랑한다던 필립이 함께 살면서 함께 밥을 먹고 데이트를 하는데, 성적인 욕구는 갖지 않는다니. 그래서 어느 날 작심하고 그가 술에 취해 밤늦게 들어왔을 때 그에게 과하다 싶게 들이댔다. 하지만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역겹다'는 표현이었다. 역겹다! 이 말에 그녀는 자신이 필립에게 여자로서는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고, 그에 대한 실망감은 분노로 뒤바뀌어 폭발하고 말았다. 그에게 잘 보일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달은 그녀의 입에서는 품위 있게 보이기 위해 절대 입에 담지 않았던 각종 비속어와 욕설이 쏟아져 나왔다. 어쩔 줄 모르고 서 있는 필립에게 마지막으로 그녀는 '이 절름발이 병신아!'라는 말로 비수로 찌르는 것 같은 상처를 그에게 남기고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리고 (아마도) 흐르는 눈물을 멈출 수가 없었다. 자신을 그토록 사랑해주었지만, 그녀 자신은 은근 경멸했던 남자에게 버림받았다는 사실이 그녀에게 참을 수 없는 배신감과 고통을 안겨주었다. 이럴 거면 도대체 자신을 왜 받아들였단 말인가!  다음날 아침 늦잠을 잔 그가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행동했을 때 그녀는 결심했다. 그의 곁을 영원히 떠나기로, 아마 조금이라도 슬퍼할 테지. 대신 그의 모든 물건과 가구들을 부수고 찢어놓았다. 분이 풀릴 때까지. 네 까짓 게 나를 거절해? 그녀의 심정은 딱 이랬을 것이다.


밀드레드의 선택 - 다시 거리로

필립의 곁을 떠난 밀드레드에게 갈 곳은 없었다. 병색이 완연한 데다가 애까지 딸린 그녀를 써주겠다는 일자리는 없었다. 입에 풀칠이라도 하기 위해 그녀는 다시 거리의 여자가 되었다. 아이는 얼마 못 가 죽고 말았다. 그녀는 점점 더 초췌해졌고 목에 종기가 났는데 시간이 지나도 없어지지가 않았다. 그녀는 두려웠다. 이러다 죽는 것이 아닌가 싶었다. 누군가에게 도움을 청하고 싶었지만 그녀에게 생각나는 사람이라고는 필립밖에 없었다. 그녀는 필립에게 편지를 했고 그는 그녀의 편지를 외면하지 않았다.


그녀를 찾아온 필립은 그녀에게 약을 사 먹이고 매일 찾아와 주었다. 필립이 빈털터리가 되어 의학공부도 중단했다는 것에는 실망감이 들었지만 상관없었다. 필립은 그녀가 빨리 취직해서 정상적인 생활을 하기 원했기 때문에 그녀는 자신이 계속 매춘을 한다는 것을 필립에게 숨겼다. 필립은 그녀에게 남은 유일한 친구이자 남자였다. 그녀를 여자로서는 거절했지만 사람으로서는 돌봐주려고 애쓰는 남자. 그 남자의 친절은 그녀에게는 쓰러지려고 할 때마다 기댈 수밖에 없는 기둥 같았다.


몰래 야하게 차려입고 연예관에 가려다가 마침내 필립에게 들키고 만 밀드레드는 필립이 팔을 붙잡으며 만류하는데도 이를 뿌리치고 연예관으로 들어가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필립은 빈털터리였고, 그녀를 계속 돌봐줄 수 없는 사람이었으며 자신의 운명은 이렇게 될 수밖에 없음을 알았기에. 그녀는 연예관 안으로 들어갔고 돈이 없어서 따라 들어오지 못하는 필립을 보면서 그와의 만남도 그것으로 끝이라는 것을 알았다. 죽음이 다가온다고 해도 더는 그에게 연락할 일이 없을 것이라는 것을 깨달으면서 그녀는 속울음을 울면서 연예관의 남자들에게 억지 미소를 지어 보였을 것이다.


밀드레드가 필립에게 한 행동들을 생각하면 그녀의 비참한 인생이 인과응보처럼 느껴지지만, 그녀의 인생도 헤아려보면  불쌍하고 안타깝다.  숙모의 집에서 얹혀살면서 카페 종업원을 하는 그녀로서는 경제적 여유가 있는 괜찮은 남자를 만나 정상적인 가정생활을 하는 것이 꿈이었다. 필립의 형편은 그녀의 기준에 맞지 않았고, 밀러라는 남성은 썩 괜찮아 보였다. 게다가 남자로서의 매력도 있었다. 그런 그가 유부남이었고, 임신한 밀드레드를 헌신짝처럼 버렸을 때 그녀의 운명은 어긋나기 시작했다. 필립이 다시 한번 그와 새 출발 할 기회를 주었지만 필립의 매력적인 친구 그리피스에게 다시 빠져들어버린 밀드레드는 정말 남자 보는 눈이 없어서 인생을 망치는 여성의 전형 같기도 하다. 아니, 그녀의 천박한 성품이 초래한 결과일 것이다.



 


밀드레드와 블란치는 상당히 다른 성격을 갖고 있다.  밀드레드는 지독하게 계산적이고 세속적인 데 비해 블란치는 나름 지적인 면이 있고, 예민하면서도 곧은 성품의 여자였다. 그래서 운명도 그렇게 달라졌는지 모른다. 비참하다는 점에서는 같은 운명이지만. 자신의 열정과 의지에 따라 사는 데는 이렇게 대가가 가혹하기도 하다. 특히 가난이 옥죄는 삶에서는. 이들의 삶이 더욱 안타깝게 생각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두 사람의 삶에는 공통점이 있는데, 사랑하는 남성에게 그의 아이를 임신한 채로 버림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고통 중에 있을 때 돌봐주고 지극한 사랑으로 감싸주는 남자를 만났다. 그런데 그들의 마음은 자신을 사랑으로 돌봐준 남자가 아니라 다른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다시 한번 그 남자에게 버림받는다. 사랑으로 돌봐주었던 남자는 돌아오기를 기다리지만 블란치 스트로브는 그 남자에게 다시 돌아가기보다는 차라리 죽음을 선택했고, 밀드레드는 거리의 여자가 되는 것을 택했다.


작가는 두 작품에서 비련의 여주인공이 겪는 이야기를 이렇게 비슷한 방식으로 이끌어가는데, 두 여성이 겪는 이야기의 끝은 각 여성의 성품에 의해서 결정이 되는 것처럼 보인다. 인생에서 탈출구를 찾지 못한 여성이 갈 수 있는 길은 이것밖에는 없는 것일까. 죽음 아니면…….


물론 1900년대 초반이라는 시대적 상황을 감안해서 읽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도 이 여성들의 삶이 꼭 옛시절이어서 그랬을 거라는 식으로만 생각할 수는 없다. 다른 많은 소설과 오페라에서 다루어지는 비련의 여주인공들도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많다. 오히려 서머싯 몸의 소설 속 여주인공의 이야기는 덜 알려진 것처럼 보인다.  현대에 사는 여성들 중에도 인생의 코너에 몰려서 비극적인 선택을 하고 마는 여성들이 제법 많다. 특히 억압적인 사회구조나 내전, 전쟁 등에 휘말릴 경우에는 더욱더.


흥미진진하지만 씁쓸할 수밖에 없는 두 여성의 삶이 안타깝게 아른거려서 이렇게나마 그들의 삶을 되짚어보고 싶었다. 



참고서적: 인간의 굴레에서 1,2/서머싯 몸/송무 옮김/민음사 세계문학전집11,12/2005

              달과 6펜스/서머싯 몸/송무 옮김/민음사 세계문학전집38/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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