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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나연 May 23. 2023

밥 솥 라면

할머니


내 입맛은 요상하다. 

내 생각이 아니라 주변에서 그랬다. 

찬물에 생된장을 풀어 마시고, 수박이나 토마토를 밥반찬으로 먹고, 

생선구이에서 눈알만 빼먹는 등의 모습 때문이라 짐작한다. 


그중 단연 1위는 라면을 밥솥에 해 먹는 것이다. 

쫄깃한 면발이 생명인 라면을 축 쳐진 밀가루 반죽으로 만드는 모습에 다들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뿐이랴. 젓가락으로 집어 후루룩 소리와 먹어줘야 하는 음식을 잘게 부서뜨려 숟가락으로 퍼먹는 모습에 

함께 라면 먹기를 포기 한 이들이 적지 않다. 

꼼수를 부린 건 아니지만 이 독특한 입맛 덕에 라면은 항상 내 차지었다. 


라면을 밥솥에 끓이는 방법은 할머니께 배웠다. 

어린 시절, 방학 때면 학교에서 팩 우유, 라면 한 박스 등을 경제적 어려움이 있는 아이들에게 주었다. 

그것은 우리 가족의 한 달 양식이었다. 라면을 가져 온 날이면 할머니는 솥에 있는 밥을 비워내고 찬물을 가득 담아 스프와 면을 넣고 뚜껑을 닫았다. 지금이야 밥솥으로 다양한 요리를 해먹는 시대지만 당시 밥솥은 위아래 간단한 버튼 조작으로 오로지 쌀밥만 가능했다. 빨간 밥솥의 버튼이 ‘달칵’하고 먹어도 좋다는 신호가 들려오기를 기다리며 우리는 그 앞을 떠나지 못했다. 


 내가 살던 시골집은 할아버지가 직접 지었다. 

옛날 방식으로 지어진 집은 부엌과 화장실이 야외에 있었다. 

더구나 목욕할 공간이 마땅치 않아 여름에는 수돗가에서, 겨울에는 야외 부엌 싱크대에서 호수줄을 끌어다 

겨우겨우 씻었다. 

부엌이 자신의 역할을 잃자 그곳에서 음식을 하는 일이 점차 줄었다. 

특히 허리 굽은 할머니에게 높은 싱크대는 편히 사용하기에 무리가 있었다. 

부엌 가스통을 떼어내고 가스버너와 밥솥을 사용해 집 안에서 음식을 해먹는 건 우리에게 자연스러운 일이 되었다. 


그러던 어느 겨울날이었다. 

뉴스에서 몇 백 년 만에 내리는 폭설이라며 긴급속보를 전했다. 

눈이 내리기 시작한 초저녁부터 할머니는 보일러 걱정에 밤잠을 설치셨다. 

이른 새벽 이부자리를 털고 일어난 할머니는 보일러 주변을 천으로 꽁꽁 싸매느라 여념이 없었다. 

잠이 덜 깬 나는 눈이 내렸다는 소식에 이불을 돌돌 싸말고 처마 밑 마루로 향했다. 

세상은 갓 쪄낸 새하얀 백설기 같았다. 

당장이라도 그 속에 파묻히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서둘러 옷을 입고 단단히 무장한 채 밖으로 향했다.

동네 곳곳을 누비며 비료포대를 엉덩이에 깔고 썰매를 탔다. 

눈싸움을 하고 눈을 뭉쳐 동네 어귀에 눈사람도 만들었다. 그렇게 한바탕 놀고 나자 배꼽시계가 울렸다. 

아침도 안 먹고 나온 터라 배가 크게 요동쳤다. 

집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었다. 

집근처에 다다르자 길목을 빗자루로 쓸고 있는 할머니가 보였다. 

얼마나 오래 길목을 닦아내고 있었던 걸까. 할머니 흰머리 위에 하얀 눈이 소복이 쌓여있었다. 

하늘에서 끝 모르는 눈이 계속 쏟아져 내렸다. 


축축해진 옷을 갈아입고 뜨뜻한 아랫목에서 몸을 녹였다. 

‘밥 먹자’는 할머니의 부름에 주린 배를 잡고 음식 냄새가 나는 곳으로 향했다. 

상 위에 올려 진 밥통 안에는 퉁퉁 불어터진 라면이 있었다. 

냄비 라면이 먹고 싶다는 내 칭얼거림에 할머니는 살얼음 낀 김치를 찢어 내 숟가락에 얹으며 

내일을 약속했다. 

하지만 다음날은 남은 국물과 밥을 섞은 죽, 그 다음날은 김치를 찢어 넣은 라면,

다음은 국물에 참치를 넣은 죽 등 밥솥을 이용한 라면요리는 눈이 녹을 때까지 계속 밥상위에 올랐다. 


시간이 한참 흐르고 난 뒤 바람이 쌀쌀해 지는 날이면 할머니는 그날의 기억을 꺼내놓으셨다. 

할머니가 밤잠 못 이룬 이유는 보일러 때문만이 아니었다. 

폭설로 인해 버스 운행이 중단되고, 얼마나 갇혀 있어야 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한창 식욕 오른 어린 손녀들의 배곯음을 걱정하셨다고 한다. 


몰아치는 추위에 집 앞 텃밭작물은 땅 속으로 자취를 감춘 지 오래였고, 

양식창고로 사용되던 벌크(곡식건조기)안에는 귤 몇 알과 쌀 한 포대 

그리고 손녀들이 받아온 라면 두 박스가 전부였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부탄가스도 남아있지 않았다. 

동네에는 작은 구멍가게조차 없을 뿐더러 버스가 오지 않으면 밖으로 나가는 것은 무리였다. 

저 멀리 코끝이 빨갛게 물들어 오는 손녀의 모습에 

할머니는 번뜩 밥솥을 이용해 라면을 끓이는 법이 떠올랐다고 하셨다. 

부탄가스 없이 따듯한 음식을 할 수 있고, 

라면을 잘게 부숴 국물과 떠먹으면 적어도 두 끼는 먹을 수 있을 거라는 계산이었다. 

이날을 계기로 라면을 밥솥에 끓여 진득하게 먹는 방법은 우리 집만의 특별식이 되었다. 


하지만 할머니는 이 이야기의 끝을 항상 미안하다는 말로 맺었다. 

내게는 기억나지 않는 그날이 할머니 마음속에는 삼시세끼 라면만 먹인 미안함, 좋은 것을 주지 못한 애달픔, 아무것도 내어줄게 없던 설움으로 맺혔나보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 가끔 마음이 애잔해 지는 날이면 밥솥에 찬물을 붓고 라면을 잘게 부숴 솥에 쏟는다. 

터치식 취사버튼을 누르고 김이 올라오기를 기다린다. 

낯선 여자 목소리가 들리고 크게 한번 증기를 뽑아내면 우리 집 특별 메뉴가 다되어 감을 안다.

당장이라도 먹고 싶지만 아직 한 김 식혀야한다. 


기다림 끝에 비로소 완성 된 따듯한 라면과 국물을 입 안 가득 넣어본다. 

영 그때 맛이 나지 않는다. 

허탈한 기분에 금세 입맛이 달아난다. 

어떻게 해도 같은 맛을 낼 수 없다. 

이미 그건 오래전에 깨달은 사실이다.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밥솥에 라면을 끓인다. 


수분을 한껏 들이마신 밀가루 특유의 눅진한 냄새, 질퍽한 면의 식감, 

미끈한 고추기름과 텁텁한 국물 맛,스프에 섞인 여러 향료의 냄새. 

그 안에서만 느낄 수 있었던 그날의 맛이 그립다. 


아니, 할머니가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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