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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씨 Apr 17. 2024

12. 완벽한 아이

2024년 4월 17일 수요일

[모드 쥘리앵 지음/ 윤진 옮김/ 복복서가]



단 하나의 목표,

타락한 세상 속에서

'인류를 재건할 아이를 만들어 내는 것'


1936년, 서른네 살의 루이 디디에는 오래 꿈꿔왔던 원대한 목표를 이루기 위해 오늘, 첫걸음을 뗐다.

프랑스 릴의 파브 지역 한 가난한 광부의 여섯 살 난 막내딸 자닌을 데려온 것이다.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게, 이 아이가 '인류를 재건할 아이'가 아니다.

'인류를 재건할 아이'를 낳을 아이다.

루이 디디에는 이 여섯 살 난 아이를 재단하고 오리고 기워서 그 목표에 다가설 도구로 사용할 참이다.


자닌이 '완벽한 아이'를 만들어 내기 위해 필요한 모든 교육 과정의 수료를 마친 어느 날, 루이 디디에는 마침내 자닌과 결혼한다. 그리고 계획한 대로, 계획한 날에, 금발머리의 여자아이를 낳는다.


'모드'다.


이 아이는 철창과 벽, 굳게 닫힌 문으로 완성된, 작지만 강렬한, 고립된 세상에서 '초인'으로 키워질 터였다.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아이를 세상으로부터 단절시키는 일이다.

무엇보다 아이에게 자신과의 관계가 절대적 사랑이라고 믿게 만들어야 한다. 그런 뒤 아이를 자신을 통하지 않고는 아무런 가치를 가질 수 없는 보잘것없는 존재로 다루면서 서서히 소유한다. 아이가 스스로를 그러한 존재로 인지하게 되는 순간 모든 기반 조건은 완성된다.

세뇌와 조건화와 가스라이팅은 주효하다.


나약한 인간을 경멸하는 아버지는 모드를 '초인'으로 만들기 위해 다양한 훈련을 고안한다.


무표정 훈련, 절벽 아래를 쳐다보는 담력 훈련, 쥐가 득시글거리는 불 꺼진 지하 창고에서 이뤄지는 죽음에의 명상 훈련, 모든 즐거움 버리기 훈련(즐거움은 곧 약점이므로), 물질에 대한 지배력을 키우는 정신 집중 훈련(염력 훈련), 전기가 통하는 울타리를 잡고 10분 버티기 훈련, 분 단위로 짜 놓은 빡빡한 하루 일정, 그 일정 중 한 부분을 차지하는 음악 선생 이브와의 지옥 같은 시간(이브는 신경질적으로 폭력적이다. 모드의 뺨을 때리는 건 물론 담배를 모드의 무릎에 비벼 끈다.), 더 지옥 같은 레몽의 성적 학대(부모는 모드의 모든 시간을 감시하지만 이때만큼은 레이더를 예민하게 작동시키지 않는다. 레몽의 악행을 목도했음에도 불구하고 모드의 눈길을 외면하는 어머니의 행태를 봤을 때에 그들이 암묵적으로 레몽의 행위에 동의했을 가능성이 크다.)


이 모든 교육과 훈련은 모드의 선택과 자유의지와는 무관하게 이루어졌고, 그 방식 또한 몹시 기괴했으며,  당연하게도 학대의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어느 날, 철새가 이동하는 시기에 날아가던 야생 오리들이 정원에 내려앉는 것을 본 아버지는 집오리들이 야생 오리들에게 '오염'되어 달아나버릴까 봐 한쪽 날개를 피가 날 정도로 짧게 자르라고 명령한다.

이 광경을 본 모드는 집오리와 자신의 처지가 다를 바 없음을 깨닫는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내 한쪽 날개의 깃털을 피가 나도록 바짝 깎아버리고 나머지 한 날개는 길고 아름다운 깃털을 지니게 만들었다'


이 부분에서 루이 디디에의 지극히 비정상적인 목표에 대해서마저 의구심이 들었다. 정말 인류를 재건할 아이를 길러내는데 목적이 있는가? 그게 아니고 한 인간에 대한 생사여탈권을 쥐고 흔들고 싶어서 이 모든 일을 꾸며낸 것이 아닌가? 타락한 세상에 상처 입은 나머지 자기만의 작은 세상을 만들고 그 속에 숨어들어 신적인 존재로 군림하려고 했던 것이 아니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드는 모든 걸 견뎌낸다. 생에의 의지는 그 무엇보다 강하다. 그 의지는 모드로 하여금 자유를 향해 한 걸음 씩 나아가게 만들었다.


죽음의 유혹에서 모드를 건져 올린 것은 동물과 음악과 책이었다.

개 린다, 조랑말 아르튀르와 페리소, 오리 피투, 이 동물들과의 대화를 통해 위안을 얻는다.


음악과도 대화한다. 오른손이 시작하면 왼손이 응답하고, 마침내 두 손이 함께 모여 연주함으로써 대화를 이어나간다.


책을 통해서는 작은 기쁨을 누린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 책은 자유의 길을 생각과 감정과 상상력으로 열어주었다.


도스토옙스키의 <백치>를 읽고 모드는 생각한다.



아버지가 좋아하는 '완벽한 존재들'과 달리 <백치> 속의 인물들은 삶으로 진동한다. 증오하고 사랑하고 미칠 듯이 흥분한다. 그리고 이들은 삶을 두려워하거나 의심하지 않고, 삶에 맞서 벽을 세우지 않는다. 반대로 삶을 사랑하고, 그 안에 잠기고, 필요하다면 아예 깊숙이 빠져버린다. 그들은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뭐든 겪어볼 만한 가치가 있어.
더 이상 두려워하지 마.



<지하로부터의 수기>를 읽고 스스로에게 말한다.


"그에게서 아무것도 기대하지 마. 언젠가 자신의 광기를 깨닫는 날이 온다 해도, 그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위험한 사람이야. 도망쳐!"



동물과 음악을 통해 치유받고, 책을 통해 길을 밝힌 모드는 새로운 음악선생님인 몰랭의 도움을 받아

새장 속에서의 15년의 시간을 거스르고 밖으로 나온다.


그리고 마침내 자유를 얻고, 진정한 삶을 살게 된다.






미친 한 인간의 그릇된 신념이 두 아이를 망가뜨렸다.

식인귀.

모드는 아버지를 식인귀라고 불렀다.

식인귀는,

폭압으로 굴종을 강요했고, 거침없는 폭력과 학대를 자행함으로써  원천적으로 이들의 자유의지를 꺾어버렸다.


그 결과 한 아이는 여섯 살에 멈춰버렸다. 아이를 낳았지만 그 아이와 같은 생각의 크기를 가지고 있다. 당연히 아이를 보호하거나  돌보는 일은 불가능하다. 오로지 세뇌와 훈련으로 식인귀의 명령에 복종할 뿐이다.


다른 한 아이는 다르다. 곪아 터진 상처에서 진물이 줄줄 흐르지만 연신 닦아 낸다. 동물, 음악 등으로 고인 그것이 썩어들 틈 없이 환기를 시켜 나간다. 이대로 식인귀에게 잡아먹힐 수 없는 아이는 책 속으로 파고든다. 더 넓은 세상, 바깥세상을 본다. 냄새를 맡는다. 귀로 듣는다. 가슴으로 느낀다. 경이로운 감정을 경험한다.


그 과정에서 식인귀가 언제든지 모드의 영혼을 들여다볼 수 있다는 말이 거짓말임을 깨닫게 된다. 모순과 위선으로 점철된 그의 본모습에 가까이 다가가게 된다. 그가 쳐 놓은 그물을 하나씩 하나씩 건드려보고 시험해 봄으로써 생각보다 그의 영향력이 절대적이지 않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조금씩 그 그물을 벗겨나간다. 그렇게 모드는 세상 속으로 나갈 준비를 마치고 있었다.


이 책은 타라 웨스트오버의 <배움의 발견>과 결이 비슷하다. 잘못된 신념에 매몰된 가부장적이고 폭력적인 아버지, 그가 만들어 놓은 틀 안에서 살아가야 하는 딸, 나름의 질서 잡힌 강고한 세상을 깨부수지 않으면 주어진 하나뿐인 삶을 그저 소모시키며 살아가야 한다는 현실, 그 현실을 직시하고 선택하고 주장하고 책임져야 하는 막중함, 마침내 모든 걸 감내하고 하는 출발, 세상 밖의 세상, 기분 좋은 생경함, 갇혔던 세상에 대한 극단의 이질감, 원래 세상으로 돌아가는 악몽,  진짜 삶으로 디딘 모든 첫 발걸음들, 걸음마다 부는 생의 숨결..!



모드와 타라는

문턱을 넘어

한 발, 한 발 힘을 주어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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