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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씨 Apr 12. 2024

10. 목소리들

2024년 4월 12일 금요일

[이승우 지음/ 문학과지성사]



이 책은 8개의 짧은 소설들로  이루어져 있다.

각각의 이야기들이 하나의 큰 줄기에서 파생되어 가지 끝에 영그러 진 열매로 맺혔다.

물관을 통해 동일한 무기영양분을 공급받는 이 열매들은 하나의 뿌리를 가지고 있다.

각기 다른 목소리로 이루어져 있지만 하나의 울림을 주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다.




<소화전의 밸브를 돌리자 물이 쏟아졌다>에는 차들이 다니는 도로 한가운데를, 소화전의 물을 뿌려 솔로 끊임없이 닦는 할머니가 나온다. 출동한 경찰들 사이에서 익숙한 걸 보니 이 할머니의 기행이 하루 이틀이 아닌가 보다. 할머니를 거칠게 끌어내는 이들에게 한 남자가 다가와 묘한 말을 한다.


"물을 뿌리는 행위는 지우기 위한 것이지만, 반복적인 물 뿌리기는 지우지 않기 위한 것이다. 반복은 기원이고 부름이다."라고.


그곳은, 사고가 여러 번 있었던 장소이기도 하지만, 전쟁 통에 사람을 모아놓고 처형했던 자리이기도 하다.


할머니는 누구를 부르고, 무엇을 기원하기 위해 그토록 애달픈 몸짓을 반복하는 것일까.




<공가>는 재개발 예정 건축지인 빈집을 중심으로 두 남녀가 만나는 이야기다. 8개의 이야기가 모두 재밌게 읽혔지만 <공가>만큼은 남다른 시선으로 읽었던 것 같다. 소설 속의 여자가 나와 너무도 닮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람을 상대할 때 과도하게 긴장하는 것과 대화한 후 잘못한 말이 있는지 검열한 뒤 자책하는 점이 그랬다. 무엇보다, 말이 없는 것, 나는 결혼 초기에 시부모님께 안부 전화 드리는 것이 너무나 고통스러웠다. 결코 그분들이 싫었던 게 아니다. 그런 차원이 아니라는 것을 <공가>의 주인공만큼은 이해할 것이다. 일정한 간격으로 대본까지 만들어 안부전화를 드렸던 것을 몇 회인가 반복했던 어느 날, 그분들에게 그 사실을 들켰을 때, 다소 냉랭하게 받으셨던 전화는 나를 더욱 주눅 들게 만들었었다.


나는, 할 말이 없을뿐더러 말과 말 사이에 다소 크게 놓인 공백을 손에 들린 불덩이처럼 어찌할 줄 몰라했다.  여자는 말한다. 할 말이 있어서 전화를 거는 건데, 전화를 걸기 위해 할 말을 찾아야 한다는 건 여간 곤혹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라고.


남편이 타국으로 출장 간 사이, 시부모의 집에 공사가 시작되고 잠시 머물 곳이 필요해진 시부모가 여자 혼자 있는 집으로 밀고 들어오면서 벌어지는 이야기가 한 축을 담당하고 있다.


다른 한 축은 재혼 가정으로, 사이비종교에 빠진 새아버지와 끝내 화합하지 못하고 집을 나와 떠돌다 그 집이 공가가 된 후에야 집을 찾게 되는 남자의 이야기로 이루어져 있다.


여자의 집에 시부모뿐만 아니라 시동생까지 들어오고 들어온 김에 노래방기기까지 들어오자 그동안의 고요를 보상이라도 받 듯 그 집은 꽉 찬 소음으로 발 디딜 틈이 없게 된다.


트리거는 마이크였다. 퇴근하고 들어온 여자의 손에 시동생이 들려준 마이크, 그때 미약하게나마 여자의 본능이 표출된다. 거부당한 마이크가 바닥으로 나동그라지면서 여자의 인내심도 해제된다. 여자는 집을 뛰쳐나온다.


억수같이 퍼붓는 빗속을 걷는 건 여자뿐만이 아니었다. 완전히 방전되어 쓰러질듯한 남자와 여자는 빗속에서 마주치고 재건축 예정지인 빈집으로 들어간다. 그곳에서 둘은 번갈아 잠을 잔다. 텅 빈 곳에서 그들은 가득 채워진다.


여자는 이따금씩 공가를 찾아와 충전하듯 잠을 자거나 책을 읽고 간다.




<마음의 부력>은 형의 죽음에 부채감을 느끼는 동생의 이야기이다. 형이 죽고 나서, 남자는 야곱과 에서를, 그리고 그의 어머니 리브가를 떠올린다. 리브가는 에서를 미워한 것이 아니다. 단지 작은 아들 야곱을 사랑했을 뿐이다. 한 사람을 사랑했을 뿐인데 다른 누군가가 사랑받지 못하는 일이 일어나는 것이 세상 이치다. 사랑이 차별을 만들어내는 것은 역설이다.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는 행위는 다른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지 않은 행위가 같은 것이 된다. 이긴 사람이 호명되면 진 사람이 누구인지 저절로 알게 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아버지를 속이고 큰 아들(형)의 것은 빼앗은 근원에는 사랑이 있을 뿐이다. 큰 아들(형)이 느꼈을 박탈감에 대한 연민과 회한이 어머니와 동생 사이에 흐르는 큰 감정의 물줄기이다.




<그 전화를 받(지 않) 았어야 했다>는 무기력하고 무신경하고 이기적인 '나'에게 사회적인 '아우'가 생기면서 시작되는 이야기다. 아버지도, 형도 없어 든든한 품을 경험해보지 못했다는 형배의 무장해제된 천진난만한 모습 앞에 '나'는 그를 '아우'로 받아들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러던 중 거래처 뇌물 수수와 여직원 성추행 사건이 터지고 가해자로 형배가 지목된다. 징계위원회에 형배의 변호인 격으로 '나'가 선정되고, 비난의 섬에 고립되어 홀로 유배생활을 하던 형배로부터 한 통의 전화가 걸려온다. '나'는 받지 않는다. 그로부터 며칠 후 형배는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앞서 말한 <마음의 부력>, <그 전화를 받(지 않) 았어야 했다> 외에 나머지 소설들 <귀가>, <목소리들>, <물 위의 잠>, <사이렌이 울릴 때-박제가 된 천재를 위하여> 저변에도 죽음(잠), 회한, 죄책감이 끈적이는 강이 되어 축축하게 흐르고 있다.  똑같은 ks마크가 찍혀야 살아갈 수 있는 현실세계에서는 덜 자라거나 웃자라면 살아남을 수 없다. 난 대로 살면서 나름의 성취와 기쁨을 누리며 사는 삶은 냉혹한 이 세계에서는 허락되지 않는다. 낙오는 곧 죽음이다. 낙오자들이 그렇게 긴 잠을 잘 수 있는 것은 사실은 잠을 자지 않는 것이라는 말, 그래서 소설 속의 패배자들은 하나같이 죽음(잠)을 택한다.  또 죽기 전에 '무덤에서 왼 손을 쑥 내밀듯이' 남겨질 자들에게 전화를 건다. 모두 전화를 받지 않는다. 내민 손을 그러쥘 이, 하나 없다. 철저히 혼자서 영면에 들어야하는 인간의 숙명과 닮아 있다. 이제 남은 것은 남겨진 이들의 회한에 사무친 삶 뿐이다.



책장을 덮고, 내용을 복기하니, 처음 <소화전...> 속의 할머니의 반복되는 행위가 소설 전체를 관통하는 죽음들에 대한 기원제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물을 뿌리고 박박 닦는, 반복되는 행위로 소설 속 수 많은 안타까운 죽음들을 부르고 있었다.  지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지우지 않기 위해 인을 치고 있었다. 그렇게 할머니는 남겨진 자들을 대표하여 그 죽음들에 대한 회한을 풀어내고 그 죽음들을 기억하기 위해 몸부림치고 있었다.


그 몸짓은 결코 기행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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