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점선면 Aug 17. 2023

독이 되는 칭찬대신

수용과 감사의 표현을

2016년 가을쯤 퇴근길, 후배교사를 가까운 전철역에 내려주기로 하고, 함께 차로 가고 있었습니다.

"00 선생님, 남자반 학급운영은 어떻게 하면 잘할 수 있어요?"


당시 근무하는 학교는 남자중학교였고, 그와 나는 같은 3학년 이웃반을 담임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 학교에 근무하기 전, 남녀공학중학교에서 2011년부터 남자반만 담임을 했으니까, 6년 내리 남학생담임을 한 셈이었습니다. 첫 근무지도 남자고등학교였습니다.


그때쯤에는 담임이 꽤나 편안해진 상태여서, 나름대로 썰을 풀었습니다.

주제는 '칭찬'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그보다 한참 전,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제목의 책이 세간의 화제였고, 학교현장에서도 칭찬의 중요성이 강조되는 분위기였던 터라 저도 별생각 없이, 제일 먼저 '칭찬'을 떠올렸습니다. 실제로 학급운영이나 수업에서 칭찬을 많이 하려고 의도적으로 애쓰고 있었고요.


남학생들의 인정욕구, 그리고, 작은 성공이나 긍정적인 변화도 알아채고, 그것을 언급해 줌으로써 관계를 강화할 수 있고, 아이들의 자존감을 세울 줄 수 있다는 것, 기타 이런저런 점들을 말했고, 후배교사는 연신 맞장구를 쳐가며 호응했습니다.



'칭찬을 함으로써 교사는 학생-교사 간의 위계를 분명히 할 수 있다. 교사는 칭찬을 주는 자의 위치에 있으므로, 긍정적인 평가와 인정을 함으로써 학생들을 원하는 방향으로 강화시킬 수 있다.'


지금 와서도 잊히지 않는 저의 발언입니다. 당시에는 당연했던 사고방식이었는데, 시간을 지나서, 제가 칭찬을 오용함으로써 의도하지 않았고, 예상하지 않았던 부정의 영향이 있었겠다는 점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행동수정학파의 관점이라면 틀린 점이 하나 없는 말이지만, 잘못된 '칭찬'은 관계나 의사소통의 장애가 될 수다는 점을 미처 생각지 못했습니다.


생각해 보면, 새로울 것도 없는 것이었습니다.


어렸을 때, '착하다'라는 말을 듣는 게 싫었습니다. 반감의 지점은 '제가요? 나는 그렇게 착한 애가 아닐 수도 있는데.'였습니다. 좀 성질머리가 안 좋은 유소년 기를 보내면서. 실제로 가족들과는 많이 싸웠습니다. 허허. (이런 저를 키우시느라 고생하신 부모님, 하늘나라에 계시지만 이 지면을 빌어 감사를 드려야겠습니다.) 그래서, 어른들의 '착하다' 소리가 싫었습니다.


의사소통에 관심이 있는 분은, 바로 답을 아실 겁니다.

칭찬을 하는 사람은 '판단'의 주체이고, 칭찬을 듣는 사람은 '판단'의 대상이 되기 때문입니다.

타인에게서 '판단'을 받는다는 것은, 불편한 처지입니다.


분명 좋은 결과이기에 칭찬을 받는 경우에도,  능력에 대한 평가가 저변에 깔린 칭찬은 오히려 불편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래서 형용사형의 칭찬-예쁘다, 똑똑하다, 착하다, 능력 있다 등등-은 위험성이 큽니다. 간혹, 칭찬이지만, 전제된 기대가 낮았음을 담은 칭찬-못할 줄 알았는데, 안될 줄 알았는데, 네가 어떻게 -등의 칭찬은 사실 칭찬이라고도 할 수 없는 판단의 말입니다.


교사-학생, 부모-자녀 간, (혹은 확대된 관계에서) 칭찬이 역효과를 가져오는 경우를 보겠습니다.


첫 번째 사례.

학생/아이가 불행감이나 불안, 불만족등 어떤 문제상황에 있는 경우, 칭찬은 상대방이 자신을 진심으로 이해하려고 하지 않는다고 느낄 수 있습니다. 칭찬에 담긴 채근 혹은 높은 긍정의 평가 때문에, 그 말을 들은 후 스스로 더 나쁜 평가를 주고 괴로워할 수도 있습니다.


 아이 : 학생선거에 나가고 싶은데, 나를 찍어주지 않으면 어떡하죠?

 선생님/부모 : 아이고, 00만큼 학생회장 자격이 충분한 아이가 누가 있다고? 너무 걱정하지 마. 운동도 잘하고, 공부도 잘하고, 친구도 많은데, 왜 이런 걱정을 하는지 모르겠네. 너 아니면 누가 회장이 될까?


아이는  불안과 걱정의 상태인데, 불편한 감정을 얼른 해소해 주고 싶은 생각에, 격려하고 긍정적인 피드백을 주면 상대방이 힘을 얻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 긍정의 멘트에도 자칫 상대에 대한 나의 판단이 들어가고, 거기에 기대의 짐까지 얹으면, 상대방은 온전히 수용된다는 느낌도 없이, 또 다른 부담만 잔뜩 짊어진 셈입니다.



두 번째.

교사/부모가 칭찬을 하면서 자신이 원하는 행동을 하도록 유도하는 도구로 칭찬을 하는 경우, 아이들은 자신들의 행동을 조작하기 위한 의도임을 눈치챌 수 있습니다. 이에 심리적 저항감이 생깁니다.

 앞서 말한 '착하다' 칭찬도 한 예일 수 있겠습니다.

 '착하다'라는 칭찬을 하는 것은 '착한 행동'을 기대하고 있음이라 이해하고,  그에 걸맞은 행동을 요구받는다고 생각하니,  불편했던 것입니다.

  

교사/부모: 00 이는 생각하는 게 어른스러워서, 이런 상황에서도 불평하지 않을 거야, 그렇지?


심각한 경우, 칭찬하는 자가 마음에 들지 않고 순종하고 싶지 않은 대상이면, 아예 어깃장을 놓는 방향으로 갈 수 있습니다. 완전히 기대를 놓아버리게 만들어버림으로써 자신을 조종하고자 하는 통제에서 놓여나고 싶을 것입니다.


세 번째.

교사/부모가 아이들이 여럿인데 그중 선택적으로 칭찬을 하는 경우, 나머지 아이들은 부정적인 평가를 받았다고 느낄 수 있습니다. 외모에 대한 민감도가 높아진 지금으로서는 외모평 자체가 금기어가 되었지만, 예전에는 일상적으로 '예쁘다'를 칭찬으로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그럼 그 예쁜 학생 옆에 예쁘다란 말을 못 들은 학생은 뭐가 되는 건가요? 하하.


칭찬이 남용되다 보면, 나중에는 칭찬받는데 익숙한 아이들이 자신에게 칭찬이 오지 않을 때, 자신이 부정적인 평가를 받았다고 느낍니다.


교사/부모: 00가 한 걸 볼까. 와~ 정말 잘했네. 자, 여기 00가 한 걸 보세요.  이만큼 하도록 해 보자.


칭찬받는 상대 옆의 주변인은 '나도 잘해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게 아니라 '나는 인정받으려면 부족하다'라는 자기 평가가 강화됩니다. 칭찬의 기준선에 못 미치는 간극이 더 부각될 뿐이며, 때로 이것은 칭찬받는 이에 대한 질투를 유발할 수도 있습니다.


'칭찬이 언제나 만능이 아닐 수 있다'라는 것을 염두에 두는 것만으로도 조금 더 나아질 수 있습니다.

상대방의 마음이 불편한 상태이면, 감정을 온전히 수용하는 언어로 응대해 주는 것이 낫습니다.

행동이나 반응을 조종, 조작하려는 칭찬은 들통나기 쉬우므로 사용하지 않는 것이 낫습니다.

특정집단이나 인물을 칭찬하는 것으로 나머지를 동기부여하려고 하는 것은 위험합니다. 각자의 성취의 우수한 점을 (매의 눈으로 찾아서!) 인정해 주고 격려해 주는 것이 낫습니다. 결과보다 과정에 나타난 '동사'형에 집중해서 칭찬을 해주는 것이 낫습니다.


그러기에, 요즘은 칭찬보다는 '고마움'을 더 많이 표현합니다.

출근하면서 아침 시간 교실 환기시킨다고 문을 활짝 열어두었는데, 그 뒤에 먼저 온 친구가 문을 닫고 에어컨을 켜놓고 다른 친구들을 맞아주니 고맙습니다.

폭우 속에도 제시간에 와서 교실에 앉아 있는 아이들 모습에 기쁘고 고맙습니다.

칠판을 잘 닦아 놓아서 고맙고, 교실을 깨끗하게 관리해서 고맙고, 분리수거를 잘해주어서 고맙고, 청소를 잘해서 고맙고 기쁩니다.

늦으면 늦는다고 카톡이나 문자를 보내줘서 고맙습니다.

부탁을 했던 일을 잘해놓으니 고맙습니다.

어렵고 힘들면 그렇다고 나에게 찾아와 말해주니 고맙습니다.

학교생활에서 아이들의 행동이 당연한 건 없다고 생각하면 고마울 일이 참 많아집니다.


집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남편이고 아이들에게도 당연한 건 없습니다.

잘 자라줘서 고맙습니다. 설거지를 해줘서 고맙고, 청소를 해줘서 고맙습니다. 열심히 운동해서 고맙습니다.  만들려고만 하면 고마운 일들이 많습니다. 하하.


해보니 알겠습니다.

'고마움'의 표현이 '칭찬'보다 훨씬 안전하였고 따뜻했습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존중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