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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점선면 Aug 25. 2023

미안해,잘못했어,사과할게, 용서해줘

우리는 함께 성장 중

우리 가족 중에서 가장 빈번하게 사과를 하는 사람, 바로 저입니다.


특히나 가장 가깝다고 느껴지는 딸과는 허물없이 농담부터 실없는 소리까지 편하게 하다 보니, 어느 순간, 딸이 픽! 토라지며 엄마! 하고 경고를 주는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얼른 사과를 합니다.


남편과 다툼이 있어도 늘 먼저 제가 먼저 사과합니다.

학교에서 시간엄수를 무척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수업에 늦거나 무슨 이유로든 뱉은 말을 이행하지 못할 때는 학생들에게 양해를 구합니다.

지극히 주관적인 평가이긴 합니다만, 저는 참 사과를 잘하는 사람입니다. 하하.


집에서만 사용하는 사과의 언어, 가족 은어가 하나 있습니다.


미잘사용


언제부터인지는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지만, 딸이 저의 발언이나 행동이 불편하고, 정정이 필요하다고 생각될 때 분명한 의사표현을 시작했습니다. 그럴 때, 조금 편리하게 용서를 구하는 표현으로, 우리끼리의 약속으로 정해서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사전적 정의부터 보겠습니다.

미안해: 너에 대한 나의 마음이 편치 못하고 부끄러워.

잘못했어:나의 말과 행동에 틀리고 그릇된 것이 있었어.

사과할게:나의 잘못을 인정하고 용서를 빌게.

용서해 줘: 나의 잘못한 일에 대하여 꾸짖거나 벌하지 말고 덮어 줘.


가끔은 작용과 반작용처럼, 너무 즉각적으로 제가 '미잘사용'을 외치는 바람에, 진정성이 느껴지지 않는다면서 딸이 꿍시렁대면, 사이사이에 내가 뭘 잘못해서, 너의 마음이 어떠했겠다, 내가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는, 학교에서 학생들 간 갈등조정에 사용하는 모델대로 구체적으로 말을 추가하여 다시 한번 용서를 구합니다.

딸이 기준이 꽤나 명확한 편이어서, 제가 잘 훈련을 받는 셈이죠.



'미안하다'고는 말하지만, 그 말을 하는 사람이 전혀 미안함을 느끼지 않는 것 같은 정황이 있습니다. 귀찮아서 하는 것 같은 '미안하다'의 표현, 차라리 하지 않음만 못합니다.


우리가 마주한 사람에게서 '미안하다'는 말을 들을 때, 의사소통에서 말의 내용이 가진 지분은 7-8% 퍼센트 밖에 되지 않습니다. 나머지는 표정, 자세, 목소리의 톤과 같은 비언어적인 요소들이죠.

이 92%에 달하는 비언어적 메시지를 무시하면서 '미안하다'라고 말을 한 것으로 사과를 마치려고 할 때, 상대방은 놀랍도록 진실한 메시지를 감지합니다. '전혀 미안해하지 않음'을요.


'미안하다'는 말조차 하지 않는 일들도 빈번합니다. 미안함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많이 보입니다. 미안함을 느끼지 못하는 건지, 미안하다는 말을 하면 자존심이 상할까 봐 그러는 건지, 책임을 져야 하는 상황이 싫은 것인지 미안하다는 말을 끝끝내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오히려 비난의 화살을 상대방에게, 아니면 제삼자에게 돌리면서 사태를 모면하려고 하는 그를, 그녀를, 그들을 누구든 한 번씩 주변에서 봐왔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그녀의 그들의 뻔뻔함에 분노해 본 경험도 있을 것입니다.


미안함을 잃어가는 세상을 한탄만 하지 말고(이건 내가 바꿀 수 있는 부분이 아니니)

내가 있는 그곳에서 나의 분량만큼이라도 제대로 된 사과를 하면서 살아야겠습니다.


십수 년 전 일인데, 성경공부 시간에 '용서'라는 주제가 나왔고, 진행하시는 분이 '이제까지 살면서 당신께서 행한 가장 큰 용서는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을 했습니다. 그때 잠시 생각 후에 저는 이런 대답을 했습니다.

'제가 행한 가장 큰 용서는 제 자신을 용서한 것입니다'

참으로 그랬습니다.

제 자신을 용서하지 않음으로써, 제 자신에게 징벌을 내리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무기력, 방치, 우울, 더 나쁘게 나락으로 떨어지게 더 자신을 몰아가는 때. 그렇게 저는 자신을 벌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저를 멈추고 방향을 바꾸게 한 것,

사랑이었습니다

용서였습니다

십자가에서 저의 죄 때문에 자신의 목숨을 내어준 사랑

그로 인해 죄로 인한 처벌로부터 나를 구원하신 사랑

목숨과도 바꾼 사랑으로 나에게 용서가 임했다는 사실이 저를 멈추게 했습니다.

그 사랑과 용서를 거부한다는 것이, 바로 교만이라는 것도 알았습니다.

낮아지고 찢긴 마음으로 십자가 앞에 무릎을 꿇고, 저 자신을 벌하는 것을 멈췄습니다.

저에게는 그런 사랑과 용서가 필요하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후로 '미안하다'는 말을 하는 것이 어렵지 않았습니다. 잘못을 알아채면, 행여 상대방 사과를 요청하면 어른 상황을 생각해 보고 그의 불편함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가 말하는 내용을 적극적 경청의 방법으로 들어주고 인정하다 보면,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고, 그러면 사과가 어렵지 않았습니다. 어떤 지점에서 상대방의 불편함이 유발되는지를 살펴야, 제대로 된 사과도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잘못을 인정하고, 미안함을 표현하는 것이 나를 '취약한 vulnerable' 상태로 만드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나는 나라는 존재로 건강하기에, 나의 잘못도 인정합니다.


하지만, 인생이 호락호락하지만은 않아서, 잘못한 게 없음에도 불구하고 부당한 비난을 하는 인물이 불행히 옆에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 인물들에게는 '인정이 안되면서도 사과'를 할 필요는 없지요. 애당초 그들에게는 당신의 '사과'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다른 욕구가 존재하는 것이니까요. 맞서 싸우거나, 거리를 두거나, 다른 대응이 필요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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