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李씨(이하 이): 시대와 세대를 뛰어넘기에 고전이라 불리는 이야기, 오늘은 지킬 박사와 하이드Dr. Jekyll and Mr. Hyde를 이야기해볼까 해.
이번 회 글을 쓰려 영화 검색을 해보니, 1886년 소설 출판 이후 현재까지 영화 버전만 123개! 뮤지컬이나 연극을 제외하고 말이지.
업로드된 포스터가 1930년 개봉 영화버전이고, 현재까지 최고의 각색, 영화화 버전이라고 인정받는다 하더군. 고전 영화라 전체공개된 자료가 있을까 하고 유튜브를 찾아봤는데, 몇몇 장면만 실려있었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짧은 동영상들만으로도 왜 이 버전이 최고라고 인정받아왔는지 감이 오더라.
제작연도를 감안하면, 화려한 시각효과를 기대할 수 없을 것 같으나, 영화라는 시각화된 매체가 보여줄 수 있는 정제된 영상이 기본이었고, 하이드로 변신하는 순간에도 전혀 어색하거나, 촌스럽게 느껴지지 않을 만큼 인물의 변화장면이 자연스러웠어.
독자가 하이드라는 인물을 상상했을 때와도 이질감이 없을 만큼, 변신 후의 하이드 모습도 제대로였지.
점선면(이하 점): 원작에 충실했다 하더라도, 각색 과정에서 조금은 변화가 있지 않았을까?
이: 가장 큰 요소라면 '여자'의 등장이랄까?
원작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여성등장인물이 영화 속에 나와. 이름은 정확히 모르겠는데, 지킬 박사를 유혹하지. 지킬 박사는 도덕적이고 이성적인 학자이자 신사지만, 하이드는 방종하고 이기적인 어두운 본성의 인물이다 보니, 하이드가 그녀를 만나, 자신의 욕망을 성취하려고 소설에 없는 사건을 일으켜.
아름답고 매력적인 여성과 야수의 본성을 가진 괴물 같은 인격의 남자, 영화에얹어주면 딱 좋을 양념이지.
영화의 엔딩도 소설과는 달리, 더 극적이었어.
소설에서는 문을 부수고 연구실로 들어오려는 집사 폴 Paul과 친구인 어터슨 Utterson을 의식하고서 지킬 박사가 음독을 하고 자살을 하는 걸로 끝나.
영화에서는 연구실로 경찰들과 지킬의 지인들이 함께 들이닥치지. 지킬박사가 '하이드는 뒷문으로 도망갔다'고 거짓 이야기를 하고, 경찰들은 뒷문으로 갔다가 다시 돌아오면서 '뒷문은 밖에서 잠겨있다'라고 말하지.
그때, 어터슨이 말해. '그 자는 지금 여기에 있다'라고. 그리고서는 당황해하는 지킬을 향해 어터슨이 손가락을 치켜들어 가리키지. 함께 있는 사람들이 어리둥절해지고, 지킬 역시 감정적인 동요가 일어나면서 변신이 시작되고 말아.
그리고서는 추격전. 연구실 안에서 쫓고 피하고, 물건을 들어 던지고, 부서지고, 벽을 타고 오르고, 한바탕 소동 끝에, 한 발의 총성.
쓰러진 하이드 곁으로 사람들이 모여들지. 그리고, 하이드는 천천히 지킬의 모습으로 돌아가.
참으로 영화스럽지?
점: 어쩌면 소설의 이야기가 지나치게 복잡하지 않았기 때문에, 영화로, 연극으로, 뮤지컬로 자신들의 상상과 표현방법으로 이 이야기를 이리저리 만들어보고 싶도록 한건 아닐까, 생각이 드네.
원작자야 자신의 소설에 여백을 만들려는 의도는 없었지만, 그 후의 사람들이 그 이야기 속을 비집고 들어가서, 이야기를 부풀려보고 싶도록 말이지.
이: 아마도.
이 소설의 주제가 짧지만강력한 영감의 원천이 되었던 거겠지.
인간의 영혼은 하나가 아니다. 선함과 악함이 공존하며, 이 성격은 분리시킬 수도 있다-는 전제로 실험하고 드디어 성공했고, 그 결과로 자신의 추함을 직면하게 되는 자의 이야기라니.
처음 실험에 성공하고얼마간은, 지킬은 자신의 성취에 고무되었고, 승리자인 것처럼 기뻤지. 그리고, 하이드라는 존재가 됨으로써 지킬이라는 인간으로 살 때 감춰두었던 퇴폐적이고 타락한 자아를 마음껏 해방시킨다는 기쁨도 있었고.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지킬은 하이드가 점점 자신의 자아를 잠식해 들어온다는 것을 깨달아. 통제불능의 상태. 자신이 원하지도 않았고, 변신의 약물을 마시지도 않았지만 자신의 내면에서 추한 생각과 본성이 솟아오를 때 하이드의 모습이 자꾸만 드러나게 되었던 거지.
이 정도라면 독자들은 실현가능한 사실적인 이야기라고는 믿지 않더라도, 그 비유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알아챌 수 있겠지. 시대와 세대를 막론하고, 변하지 않는 주제. 인간의 양면성.
지킬은 하이드라는 존재가 가지는 비이성적이고 야수적이고 퇴폐적이고 이기적이고 타락하고 방종하며, 비도덕적인 행위들에 대해 거리를 두고 살아가고 있긴 했지만, 내부에서는 그런 삶의 방식에 대한 갈증이 있지 않았나 싶어.
그런 행위의 주체자는 내가 아니다. 나 아닌 다른 존재다. 그렇게 생각하면 본인의 죄책감을 덜 수 있으니까. 오늘날 다중인격자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범죄행위에 대해서 사면을 요구하는 근거와 비슷해 보이네.
하이드의 야수성, 비열한 행동을 알고서도 그 경계를 분명히 하지 않았다는 것, 그것이 지킬의 실패였다는 생각이 들어. 하이드로서 버리고 끊기 싫은 쾌락이 있었다는 얘기지.
점: 이 씨의 말은, 하이드로서 살아가도록 허락한 것이 지킬의 선택이었다는 뜻인가?
이: 그렇지. 단, 지킬 자신을 하이드로부터 완전히 안전하게 격리시킬 수 없다는 한계를 몰랐으니까.
처음에는 내가 선택했던 것들이, 나중에는 나로 선택하게끔 하는 게 아니라, 나를 종속시켜 버리는 것들. 가까운 예를 들자면 '중독'이 아닐까 해. 중독의 끝은 자아의 소실, 혹은 죽음.
아, 너무 멀리 왔나 싶다.
점: 인간은 누구나 다 하이드 같은 본성이 있는 건가? 아이들도?
이: 적어도, 내 생각엔.
우리 모두가 하이드를 품고 살지. 다만 누군가는 경계하고 다스리고, 자신의 통제아래 두고 살지만, 어떤 이들은 하이드에게 자신을 내어주다, 점점 더 하이드가 강력해져서 그 사람을 잠식하고 그를 통제아래 둘 수도.
점: 내 안의 하이드를 길들일 수 있는 방법, 이 씨는 뭐라고 생각해?
이: 빛 가운데로 나가는 것. 어둡고 습한 내면에 웅크리고 포자를 퍼뜨리며 번식해 가는 곰팡이 같은 악에 빛을 비추는 것.
그래서 내면의 모습이 다 드러나도록, 그래서 바로 보도록, 그리고 빛의 열기와 광선으로 어둠을 몰아내는 것.
내 안의 하이드는 어떤 모습인지 빛 아래에서 응시할 때, 나는 나를 알고, 그를 다스릴 방법을 찾을 수 있을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