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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점선면 Oct 14. 2023

비프 로먼의 새 출발

세일즈맨의 죽음

이李씨(이하 이): 오늘의 이야기, '세일즈맨의 죽음 Death of a salesman'은 원작이 희곡이지만, 희곡의 인기와 명성 덕분인지 영화로도 제작되었더군. 나는 위의 포스터 1985년 텔레비전 드라마 버전으로, 유튜브에 전체공개되어 있는 걸 시청했어.


원작에 무척이나 충실했고, 윌리 로먼 역의 더스틴 호프만의 연기도 훌륭했고, 그의 가족들 모두 연기파 배우기들이라 활자로 대사를 읽을 때 보다, 인물들의 감정이 펄펄 살아있다고 느꼈네.


재미있는 건, 알고리즘이 연관 동영상으로 '비프 Biff의 독백'을 주르르 딸려 보여주었는데, 유명한 외국 영화배우부터 한국의 연극인들까지, 같은 대사지만 미묘한 차이가 있더라. 배우들이 배역의 인물을 해석하고 표현하는 기량과 방법이 다르다는 게 뭔지 알 것 같았어.


점선면(이하 점): '비프의 독백'이라는 게 왜 이 극에서 주목받게 된 거야?


: 극의 후반부에서 주인공, 세일즈맨 윌리 로먼 Willy Roman의 큰 아이들 비프 로먼이 아빠에게 말하는 조금 긴 독백인데, 자신과 아빠에 각성이 담겨있거든. 극의 처음부터 그때까지 위태위태하게 두 사람은 긴장 상태인데, 둘 모두 자기들의 현실을 직시하고 인정하는 대신, 허황된 희망을 말하며 그렇게 믿으려고 애쓴다는 느낌이거든. 이걸 비프가 깨버리는 거야. 제대로 나를 보라고요!라는 외침인 거지.


'세일즈맨의 죽음'은 한때 잘 나가던 외판원 윌리 로먼이 나이가 들면서 회사에서 자기 자리를 잃고, 결국은 가족들을 위해서 자기의 사망보험금을 남기려고 자동차사고로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는 큰 줄거리지만, 그 안에는 가족들과의 갈등도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어. 그래서,  가족들이 극의 후반부, 윌리가 자살을 감행하기 전 저녁, 부엌에서 서로 격렬하게 다투는 모습은 무겁고도 아파.


: 그럼, 그런 아버지와 관계에서 비프가 제대로 건강하게 성장하는 게 어려울 수도 있었겠네. 그럼 이 씨가 제목에서 말하는 비프 로먼의 새 출발은, 어떤 거야?


: 극은 윌리 로먼의 장례식으로 끝이 나지만, 아버지의 죽음을 지나며 비프 로먼은 이렇게 생각하고 마음먹지 않았을까, 나의 버전으로 생각해 봤어. 비프 로먼이 그의 친구 버나드에게 들려주는 이야기 한 번 들어봐.


 오늘 마당으로 들어서다가 잠시 주춤했어. 아버지가 사고 나던 날 밤, 마당에 씨앗을 심으려고 했었거든. 그때 들고 나온 플래시, 씨앗봉지, 괭이가 그대로 마당 구석에서 뒹굴고 있는 거야. 구태여 왜 그 밤에 아버지는 씨앗을 심으려고 했을까?


 씨앗봉지를 치우려다 이제까지 나지 않던 눈물이 났어. 바로 그 밤에 세상을 떠날 사람이, 그것도 자기 의지로 죽음을 선택할 사람이 어째서 그 어두운 밤에 씨앗을 심으러 마당에 나왔는지. 나는 봉지를 치우려다 말고, 봉지에 쓰인 대로 땅을 파고 씨앗을 심었어. 오늘 아버지를 땅에 묻었던 것처럼.


 아버지는 무덤 속에서 다시 살아날 수 없겠지만, 씨앗들은 시간이 지나고 때가 되면 싹을 틔우고 나오겠지. 한 때는 나도 아버지의 새싹이었던 때가 있었지. 싱싱하게 물이 오르고, 튼실한 줄기를 내고 뭔가 근사한 열매를 맺을 줄 알았는데. 그게 아버지와 어머니의 바람이기도 했겠지. 하지만 어쩌다 내 인생이 이렇게 꼬였는지. 왜 이 모양인지.


 아버지가 돌아가신 던 날 저녁, 우린 정말 한바탕 대단한 난리를 쳤지. 아, 집에 오기 전 프랑크 식당에서부터 이미 엉망이었어. 원래 계획이야 내 사업의 착수를 축하하는 저녁만찬이었지만, 나나 아버지나 비참한 꼴이었어.


 아버지는 회사에서 해고를 당했고, 나는 올리버를 제대로 만나지도 못하고 바보처럼 기다리기만 하다가 결국 그 사람 만년필을 주머니에 숨긴 채 뛰쳐나왔으니까. 그런데도 웃긴 건 뭔지 알아? 아버지는 내가 맘만 먹으면 다 할 수 있는 능력자라고 생각하고 있다니까. 그건 믿음이 아니야. 허상이지. 그냥 그런 망상에 사로잡혀있는 거야.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전혀 모른다고.


 나는 너무 부끄러워서 차마 너한테 말할 수가 없었어. 나에게 우상과도 같던 나의 아버지가 부정을 저지르는 놈팽이고, 아들한테는 사과할 줄도 모르고 반성할 줄도 모르고 여전히 고집스럽게 잘난 아버지인척, 아내에게는 잘난 남편인척 하는 위선자인걸 알게 되었을 때 얼마나 실망스러운지. 그 분노 때문에 난 아버지의 기대대로 살기가 싫어졌던 거 같아. 그래, 그날 이후 나는 영영 아버지에게 진실을 말하는 것이 불가능했던 거야.


 게다가 아버지는 한때는 성공적인 외판이었는지 몰라도 세월이 지나면서 별 볼일 없는 그저 그런 아니, 그보다 못한 초라한 인간이었다고. 그러면서도 우리는 Romans!(로만가족!)을 외치면서 무슨 장대한 꿈을 이룰 수 있는 것처럼 헛된 소망에 우리를 스스로 속이며 살아온 거야.


 아버지의 망상이 더 엿같은 것은, 허황된 꿈을 헤매면서 한 편으로는 가족들 몰래 죽을 계획을 하고 있었다는 거지. 그래, 그럴 수도 있었다고 쳐도, 정작 가족들 앞에 자살도구로 쓰려던 호스를 꺼내 놓으니 모르는 일처럼 시치미를 떼는 거야! 도망가고, 외면하고, 허세 부리며 결국 현실이 눈앞까지 제 존재를 들이미니까, 어쩔 줄 몰라 눈감으려고만 했어.


  나, 가엾은 윌리 로먼과는 다른 삶을 살고 싶어. 지금부터라도.

예전의 비프 로먼을 땅에 묻고, 새 모습으로 세상에 나오고 싶어. 그래, 죽음과 같은 침묵만이 보인다 해도 거기 씨앗과 함께 옛 비프 로먼은 죽음을 맞고, 새로운 비프 로먼으로 준비되고 있는 거야.


 진부한 은유인가? 윌리 로만의 소망, 씨앗을 심는 행위?

그는 결과를 보지 못했지만, 나는 이루어 내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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