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안락함을 원하지 않습니다. 나는 신을 원하고, 시를 원하고, 참된 위험을 원하고, 자유를 원하고, 그리고 선을 원합니다, 나는 죄악을 원합니다." ...... "늙고 추악해지고 성 불능이 되는 권리와 매독과 암에 시달리는 권리와 먹을 것이 너무 업어서 고생하는 권리와 이투성이가 되는 권리와 내일은 어떻게 될지 끊임없이 걱정하면서 살아갈 권리와 장티푸스를 앓은 권리와 온갖 종류의 형언할 수 없는 고통으로 괴로워할 권리는 물론이겠고요." 한참 동안 침묵이 흘렀다. "나는 그런 것들을 모두 요구합니다." 마침내 야만인이 말했다. (p.362-363)
얼마 전 유튜브에서
'정자와 난자 없이도 인간이 만들어질 수 있다'는 비슷한 제목의 영상을 보았다.
핵심은 줄기세포만 있으면, 이 세포에 적절한 자극을 주어서 인간으로 배양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어느 정도까지가 진실이고, 현재 과학으로 가능한 지점인지는 확인할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이 신의 영역을 도전하는 시도가 지금껏 있었고, 앞으로도 멈추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다.
이 영상이 뒤로 미루고만 있던 독서후기를 쓰라고 나에게 종을 울렸다.
나는 왜 세대와 시대를 넘어 문학사에 길이 남을 이 엄청난 소설에 대해서, 몇 달간을 염두에 두면서도 첫 시작을 못하고 있었는가?
솔직하게 고백하건대, 압도당했기 때문이다.
나지막한 동산이면 좋아, 한 바퀴 돌고 온다는 심산으로 첫 발걸음이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장대한 산봉우리가 하늘을 향해 저 멀리 솟아 있는 산 앞에서, 나는 그만 내가 얼마나 작은 인간인지 깨닫는다. 바로 그런 기분이었다.
이번 글에도 온전한 감상을 다 쓰기에도 무리일 것이다.
이 소설이 던지는 수많은 논쟁거리, 생각거리 중에서 나를 가장 강하게 사로잡았던 것, 인용문의 내용하나에만 집중하겠다.
올더스 헉슬리 소설 '멋진 신세계 Brave New World'.
문명화된 런던으로 이주하게 된 야만인 존. 그는 문명세계와 동떨어진 원주민지역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런던의 신문물 모든 것이 새롭다. 하지만 이내 깨닫는다. 뭔가가 잘못되었다는 걸.
그를 괴롭힌 것은, 그가 가진 '사랑'의 가치와는 다른 문명세계의 성 욕망 해결법이다. 여기는 '사랑'이라는 감정자체가 생소하다. 성욕구와 그것을 해결하는 행위만 있을 뿐이다.
가장 크게 그를 충격에 빠뜨린 것은, '죽음'에 대한 태도이다. 그에게는 엄마 린다의 임종장면이 슬프고 비탄의 순간이지만, 그 감정의 표현조차 수용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이 사회에서는 어려서부터 '죽음'에 길들여지도록 교육받는다. '죽음'은 소녀 같은 신체지만 뇌와 심장이 낡았다는 이유로 생존의 시간을 끝내는 과정일 뿐이고, 슬퍼할 가족도 없다. 애당초 가족이라는 관계가 존재하지 않으므로. 병원에서 죽음의 처리가 끝나면 헬리콥터로 이송되어 인(인체에 남은 화학성분)을 추출하는 공장에서 마지막 효용을 다한다.
이 사회의 사랑과 죽음에 대한 태도에 광분한 야만인 존, 엄마가 죽음을 맞은 병원 현관에서 퇴근시간이 되어 쏟아져 나온 대량생산방식으로 만들어진 쌍둥이들, 보카노프스키 집단 수백 명을 본다. 같은 얼굴들. 존의 문명세계에 대한 혐오가 치솟는다. 그래서, 영혼의 진정제 '소마' 배급을 기다리는 델타계급 보카노프스키 무리 앞에서 소마 약통을 집어던지며 소리친다.
'이것은 독약이다!'
안정되고 통제된 사회에 소동을 일으킨 야만인 존, 세계의 통제관 무스타파 몬드 앞에 선다. 그리고 소동의 현장에 같이 있던 두 명의 인물도 함께. 한 명은 사회에서 배척당하는 입장이라서 곁길을 탐색하던 알파 계급 버나드. 한 명은 거칠 것 없는 명성과 능력으로 촉망받으나, 자신의 예술적인 고뇌의 결과 이 사회의 통제와 안녕에 회의적인 알파 계급 홀름헬츠.
넷이서 시작하고, 끝은 마지막 존과 무스타파 몬드 두 사람만 남아 나누는 대화로 작가의 시선과 사유를 가늠해 볼 수 있다.
예술, 과학, 종교 VS 이 세 가지가 완벽히 통제된 사회
고뇌, 고통, 불안, 자유 VS 안정, 평화, 행복, 종속
나는 무스타파 몬드의 집무실에서 이뤄지는 이 대화에 매료되었다.
이 문명화된 사회의 수장인 무스타파 몬드가 무엇을 선택하고, 무엇을 포기했는지, 선택의 대가라고 지목한 그 대목에서, 그 역시도 문명세계의 가치에 대해 회의적인 일면이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 인간적!이라 느껴지기까지 했다.
서두의 인용문은 이 대화의 마지막 부분이다.
몇 세기 전의 작가가 던진 질문은 지금까지도 더 크게 메아리치며 울리고 있다.
인간의 미래에 대한 이 예언과 경고: 인간이 그토록 원하는 지향점인 '행복'이 과학문명의 통제 속에 인간됨을 제한함으로 이뤄지는 것이라면, 과연 이 '행복'은 가치 있는 것인가?
개인의 개별성과 독립성, 자유의지는 사회의 갈등만을 조장하기에, 존재하는 모든 사회구성원은 사회의 안정을 위한 작은 톱니바퀴로 그 소임을 다하는 것이 최고의 선이라면, 인간 개인의 '존엄'은 어디서 찾겠는가?
하나님의 인간의 창조주시라는 전제를 놓고 말한다.
그분은 우리에게 인생이라는 제한된 이 땅의 시간을 허락하셨다.
로봇처럼 우리가 기계적으로 사는 게 아니기에, 각기 제 갈길로 가다가 죄를 짓고 타락하기도 한다.
고통 없는 마취제로 종교를 허락한 게 아니다. 고통과 눈물도 따른다.
하지만, 창조주의 눈길 아래, 각 영혼은 고유한 존재이며, 사랑받을 피조물이다.
'멋진 신세계'는 예술, 과학, 종교, 인간 안에 깃든 신성을 무시하고, '사회의 안정, 그로 인한 평화와 행복'이라는 슬로건을 내걸었다. 이 보다 더한 인간의 반항이 어디 있는가. 자유와 도덕의 가치는 고리타분하고 비문명적인 과거의 쓰레기이다. 더 이상, 신의 은혜는 필요 없다.
그래서, 나는 존의 저 말이 좋다.
하지만, 배양액 속에서 만들어져 세상에 나오고, 어릴 때부터 수면교육을 받으면서 이 문명사회의 규칙이 나의 잠재의식을 채운다면, 그래서 내가 병원현관 앞에서 '소마'배급을 기다리다가 야만인 존이 소마통을 집어던지는 장면을 본다면, 나는 존에게 동의할 수 있을까?
두 사람의 대화가 나에게 질문을 던졌고, 나는 존의 대답을 택했기에 또 다른 성찰을 불러온다.
나는 지금 사회가 요구하는 명령과 가치로부터 얼마나 자유롭게 독립적으로 서 있고, 당당하게 행복할 수 있는가? 지금 여기서 '불행'이라고 규정되는 일이라 할지라도 나의 가치로 선택한 불행이라면 기꺼이 움켜 안고 온전하게 그 감정을 통과할 다짐을 할 수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