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아름다움에 사로잡힌 화가 바질 Basil은 도리안의 아름다움을 초상화에 담으려고 온 열정을 쏟아부어.
바질의 작업과 모델인 도리안을 만나게 된 헨리 Henry. 그 역시 도리안의 아름다움에 경탄하면서, 도리안이 여태 들어보지 못한 말을 던지지. 젊음과 아름다움은 지속되지 못하는 것이되, 아름다움과 감각적인 충족 그러니까 쾌락만이 인생의 진정한 즐거움이라는 것.
헨리가 심어놓은 쾌락주의적인 인생관은 도리안의 마음속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해.
누군들 자신의 아름다움에 스스로 경탄하는 자들이라면, 그 아름다움이 사라지기를 바랄까.
젊음과 아름다움이 조금씩 사그라들면서 자신의 매력도 그와 같이 시들어질 것이라는 걸 생각한 도리안은 절규처럼, 기도인지 모를 말을 하지.
(바질이 완성한 자신의 초상화를 보면서)자신은 영원히 젊음을 간직하고 싶다고.
그리고, 그의 바람은 이루어지지. 신비한 방법으로.
점선면(이하 점): 시간이 지나면서도 자기가 늙지 않고, 아름다움이 시들지 않는다는 것을 어떻게 알게 된 거야?
이: 그가 저지른 악행의 영향이 자기의 모습이 아니라, 자기의 모습을 담은 초상화에 나타난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
그가 한때 사랑을 고백했다가, 차갑게 버리고 떠난 어린 여배우의 죽음을 알게 되어서도, 그는 양심의 가책 같은 게 없었어. 대신 냉담하고, 이기적인 그의 마음의 상태가 초상화의 모습에서 그의 표정을 미세하게 뒤틀리게 만들었다는 걸 발견했거든.
점: 그럼, 그가 악행을 저지를 때마다 초상화의 모습은 점점 추해지는 거네. 그는 여전히 젊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남고?
이: 그게, 도리안에게 두렵고 숨기고 싶은 일이기는 했지.
그의 언행에 따른 평판이 점점 이상하게 변해가는 걸 알게 된 그의 추종자이자, 초상화의 작가 바질과 도리안, 그리고 도리안의 추하게 변한 초상화. 다락방에서 초상화를 사이에 두고 마주한 두 사람의 대면은 결국, 끔찍한 살인으로 끝이 나.
그것도 모자라서, 도리안은 한때 자신의 친구였던 화학자를 불러내어, 바질의 사체를 처리하도록 만들지.
점: 아름다움과 젊음을 가졌으니, 그것을 무기로 도리안이 저질렀을 쾌락주의적인 악행이라는 게, 상상이 가네. 거기다가 살인까지. 이렇게 걷잡을 수 없도록 도리안이 어둠에 빠진 결정적인 이유가 오직 헨리의 말 한마디였던 거야?
이: 헨리는 순진했던 도리안에게 프랑스 소설 한 권을 보내줬거든. 그 책이 끼친 영향이 크게 있었던 것으로 나와. 그게 실존하는 책인지까지는 모르겠는데, 쾌락주의적이고, 현세적인 철학서라는 점에서, 도리안을 사로잡았지.
오스카 와일드. 이 소설의 작가인 그가 내가 알고 있던 순수하고 아름다운 소설 '행복한 왕자'와 동일한 작가인가 싶었어. 이런 인간 본성의 퇴폐적인 면과 어둠을 잔인하게 그려내는 소설을 쓰다니.
점: 이런 아름다운 인물의 추한 모습을 담은 소설이 영화로 만들어졌다니, 영화 감상평은 어떤가?
이: 주연배우의 미모가 훌륭했으니, 소설이 그려낸 주인공에 대한 사람들의 경외는 이질적이지 않았고, 원작을 잘 담은 스토리로 영상을 보니, 그 당시의 영국 상류층들의 모임이 생각보다 화려하게 보이더군.
어둡고 음습한 장면들도 시각적으로 대비가 되니, 영화로서도 나쁘지 않았고.
세월이 흐른 뒤에도 여전히 아름다움과 젊음을 간직한 도리안과, 어느새 늙어버린 헨리와 사교모임의 귀족들이 다시 만나는 장면으로, 도리안의 젊음이 악마적으로 보이는 효과도.
마지막 결말 부분은 조금 다른 것이, 영화에서는 극적인 효과 때문인지, 도리안의 초상화가 있는 다락방에 불이 타오르는 장면이 있어. 소설에서는 화재사건은 없이 도리안이 죽음을 맞아.
점: 도리안의 초상화는 그의 영혼의 초상화였던 거네. 비록 육신은 아름다웠다 할지라도, 실제 그의 마음과 생각은 어떤 모습인지 고스란히 흔적을 품고 있으니.
그에게 영원히 변하지 않는 외모의 아름다움과 젊음은 오히려 축복이라기보다는 저주가 아닌가.
젊음과 아름다움을 자신이 아닌 다른 이를 위한 데 사용되지 않는 채, 쾌락과 이기심을 부추기는 역할만 했으니. 그의 곁에 진정으로 그를 아끼고 사랑해 주는 관계가 남아 있었겠나?
이: 누구나 젊음을 간직하고 싶고, 더 아름다워지고 싶어 하는 욕망이 있지만, 생각해 보면, 애당초 이게 타인을 위한 욕구는 아니겠지. 세상이 끝으로 갈 수도록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한다고 했어.
성경말씀에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이니
For everything in the world_ the lust of the flesh, the lust of the eyes, and the pride of life_comes not from the Father but from the world..(1 John 2:16)'라 하셨어.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인 인간으로서 세월이 가면서 노쇠해지는 육신에 마음이 아프기고 서럽기도 하겠지. 하지만, 이것이 끝이 아니라는 걸 생각해 보자.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오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
So we do not lose heart. Though our outer self is wasting away, our inner self is being renewed day by day... So we fix our eyes not on what is seen but on what is unseen, since what is seen is temporary, but what is unseen is eternal. ( 2 Gorinthian 4:16, 18)
점: 이 소설은 쾌락주의, 세속주의적인 가치 때문에 비난받았다고 하던데, 이 씨의 말을 듣고 보니, 오히려, 그 반대일세. 타자를 대상화하여 자신의 만족을 채울 때마다 도리안의 영혼은 시들어갔다는, 그리하여 스스로 추하게 일그러진 영혼을 종말을 마주했다는 것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