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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점선면 Apr 13. 2023

잃어버린 숟가락

지상의 숟가락 하나, 똥낑이

2022. 4. 14.(목)

4월 13일 언니는 서울로 돌아갔다. 언니가 돌아가자, 오빠와 나는 둘이서 어머니를 돌보는 루틴을 빨리 만들어냈다. 둘 다 루틴을 좋아하는 성향이라 따로 말한 바 없지만 역할분담이 딱딱 이뤄졌다. 나까지 올라가면 오빠가 온전히 혼자 담당해야 하기에, 대부분의 간병과 식사준비가 내 몫이었다. 적어도 내가 있는 기간은 오빠의 휴식기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오빠는 어머니의 식사준비, 밤 중에 석션이 필요할 때 일했다.


그래도 남는 시간이 생겼다. 생각과 마음을 정리하려고 일기를 쓰고, 독서모임에서 지정된 책을 읽었다. 이번달은 루니 샐리의 '노멀 피플(Normal People)'.


불안한 청춘의 사랑이야기를 따라가자니, 감정의 소진이 너무 컸다. 불안도 힘이라 할 수 있을까? 20대였다면 내 불안의 힘으로, 동요하는 그들의 사랑이야기를 쫓았을 것이다. 아슬아슬한 감정선을 따라, 그들의 방황에 깊이 빠져들었을 것 같기도 했다.


이제는 불안과 자기 효용에 대한 의심의 문제를 어느 정도 해결본 나이다 보니, 20대의 초라하고 미숙했던 내 모습이 소환되고, 객관화하여 바라보게 되자 자괴감이 들었다.

그래서, 책을 읽는 게 힘이 들었다.


뭔가, 생각을 전환시킬 거리가 필요했다.


어머니 책장을 들여다봤다. 노년에 한수풀도서관 책사랑모임에 나가시면서 동료들과 함께 읽어간 책들도 있고, 동료들이 추천해 주면 사 읽은 책들도 있어서 한국문학서적으로 치자면 나의 책장보다 더 다채롭다.


책장에 흥미를 끄는 책이 있었다. '똥낑이'


책을 뽑아 들면서, 혹시? 하고 생각했는데, 역시나 예감이 맞았다. 제주도 출신작가 현기영 님의 성장소설 '지상의 숟가락 하나'라는 소설을 청소년용으로 각색한 것이었다. 흐뭇한 미소가 났다. 나와 어머니는 이 소설과 행복한 사연이 있다. 책을 읽기 시작했다. 1999년 읽은 후, 13년 만이다.


1999년, 실천문학사에서 출판된 '지상의 숟가락 하나'를 신문 광고에서 보고, 바로 종로의 대형서점에서 샀다. 서울 종로에서 직장생활을 하고 있을 때였다. 한 페이지 한 페이지 제주에서 나고 자란 사람이라면 공감할 이야기들에 웃고, 마음 아파하면서, 한 소년의 성장기를 따라가다 보면 가슴 아픈 4.3 사건에도 이른다.


4.3 사건이 있던 1948년, 어머니는 16세 소녀였다. 집단적인 광기가 섬 전체에 몰아칠 때였다. 이른바 군경에 의해서 빨치산과 내통하고 있다고 의심되던 중산간마을 주민이었던 어머니의 가족은 다행히 몰살을 면하는 대신, 하루아침에 바닷가 마을 옹포리 가축도살장으로 이송되어 집단생활을 시작한다. 어머니는 4.3 한복판의 목격자이자 생존자다.


갓 출판된 소설을 읽을 때. 작가가 그려낸 제주의 삶에, 무려 반세대의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강한 동질감은 느꼈다. 어머니를 생각했다. 자신의 자서전을 쓸 정도로 글쓰기에 애착이 있긴 하지만, 제대로 된 글쓰기 교육은 받아본 적이 없는 어머니에게 이 책은 좋은 '교재'가 될 것 같았다. 어머니에게 책을 보내드렸다.


어머니에게도 이 책은 남다른 감흥을 주었던 모양이다. 제주도의 투박한 말씨, 갯내음, 흙내음, 계절과 역사가 담긴 이 소설을 읽고 쓴 독후감으로 어머니는 1999년 제주도서관 독후감 응모에 입상했다. 공식적인 글쓰기 관련 행사에서 첫 수상기록이 되었다.


어머니의 시 중에 한 편.

이 소설과 어딘가 닮은 데가 있다.



                  숟가락

                                                 오계아

햇살이 번쩍 뜰 때 입에 문 숟가락 하나

서산에 해질 때까지 오로지 그 하나를

노을 녘 갯마루에서 닦을 꿈 꾸어본다.


뜻 없이 방치한 채 온종일 걸어왔고

작가의 길에 앉아서 즐겨도 보았으니

그대로 그냥 그대로 걸어가면 될 것을


새 하늘 푸른 바람에 부딪히는 몸과 마음

앉으려 해 보지만 차마 앉고 못 견디어

오라고 부를 때까지 닦아야 할 내 숟가락이여



지금 어머니의 숟가락은 어디에 있나요? 


질기고 질기게 잡초처럼 제주도 척박한 곳에서 삶을 살아냈던 소설 속 인물들과 한 세대를 사셨던 어머니의 생명이 점점 사그라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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