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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점선면 Apr 12. 2023

삶이 인과응보뿐이라면

어머니를 찾아온 문병객들

2022. 4. 12. (화)

어머니가 집으로 왔다는 소식이 전해진 모양이다. 어머니를 보러 사람들이 오기 시작했다.


먼저는 앞집 삼촌. (제주도에서는 가까운 이웃은 전부 삼촌이다. 가문이나 혈족으로 얽힌 관계는 괸당이라 부른다.) 어머니는 뇌손상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과거에 대한 기억은 손실되지 않았다. 삼촌을 보고, 바로 알아봤다. 두 노인이 서로를 붙들고 눈물을 흘렸다. 남편과 사별하고 혼자된 두 사람은 서로를 의지하면서 이십여 년을 지내왔다.


저녁에는 윗마을 괸당 할머니 삼총사가 오셨다.

'우리 알아지쿠가?'

질문에 어머니는 누구 어멍, 누구 어멍... 자녀들의 이름을 넣은 호칭으로 답했다.

'아이구. 다 알암심게.'

....



어머니를 마주한 삼촌과 괸당 할머니들이 안타까운 마음에 했던 말들이 맘에 남았다.

'생전에 남헌티 나쁜 말도 안 허고 나쁜 짓도 안 헌 어른이, 어떵 영 돼서?'


어머니의 성정이 그랬다.

자식들에게 큰소리로 욕설을 하거나, 쉽게 손찌검을 하지도 않았다. 패를 나눠 사람을 미워하는 일도 없고, 악담이나 모함하고 내 편만 옳다 하는 정치색과도 거리가 멀었다. 시부모님에게도 마음이 썩어지더라도 순종적인 며느리였다. 다만, 어머니의 정신세계를 이해하지도 존중하지도 않는 아버지와의 갈등으로 괴로워하기도 했지만, 그마저도 몰래하는 글쓰기로 승화시켰고 결국 아버지를 어머니의 지원자로 바꿔놓았다.


자, 나는 지금 괸당할머니들의 언급에 꽂혀 있다. 위로와 안타까움의 마음을 가지고 어머니가 이런 병을 얻을 어른이 아님을 말하고 있었다. 병을 곧 형벌의 개념으로 치환하여 생각하기 때문이다.

몸의 자유를 구속하거나 통증을 유발하는 질병은 형벌 같은 개념이다. 괴롭기 때문이리라.


물론 이 세상 모두가 질병의 발현이 죄에 대한 대가라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어떤 좋지 않은 일이 자신에게 혹은 누군가에 닥쳤을 때, '무슨 죄를 지었길래(나쁜 일을 했길래)?'로 연결하는 이들도 있다.


얼마나 심각한 이중적 잣대가 이 '죄'에 개념에 적용되는지.

타인의 죄에는 반드시 '인과응보'가 따르기를 바란다.

자신이 저지른 죄에 대해서는 어떤가?

어쩌면 자신이 어떤 죄를 저지르는지 자각하지도 못하고 있을 수도 있다. 자신이 저지른  모든 죄에도 인과응보의 법칙에 따라 형벌이 내려지기를 기다리는가?


죄의 인과응보가 선함으로 죄를 상쇄할 수 있는 게 아니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100개의 선한 행위와 50개의 죄.

상쇄의 개념으로 치자면 선한 행위 50이 남는다.


하지만, 하나님 공의의 계산법에는 그게 통하지 않는다.

100개의 선한 행위는 선한 행위이지만, 50개의 죄는 죄이므로 50개의 죄에 대한 형벌이 따를 수밖에 없다. 더군다나 하나님은 마음의 죄까지 보는 분이다. 인간에게는 선한 행위가 구원의 방법이 될 수가 없는 이유다.


기독교적인 관점에서, 죄는 죄인인 인간 스스로가 해결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그러기에, 예수 그리스도가 죄인 된 우리를 대신해서 죄의 대가로 당한 십자가 죽음. 그에 대한 믿음만이 구원을 얻는 유일한 방법이 된다.


이런 면죄의 개념이 뻔뻔한 오만함으로 곡해되는 경우가 있다. 대표적으로 영화 '밀양'에서 그렇다. 진실한 회개에 이른 사람이라면 자신이 상처 준  이에게 그럴 수 없다. 기독교가 말하는 회개와 구원을 오해하게 만드는 장면이다.



성경 인물 중에 욥(Job)은 고난 받는 인간상의 대표 격이다. 가족, 재산, 건강, 명예를 잃고 인생의 비참한 바닥으로 추락한다. 이때 그에게 온 그의 친구들과 후배 격인 인물들 총 네 명이 등장하는데, 이들이 욥에게 하는 말, 위로 같고 조언 같은 말들이지만, 핵심을 따지고 보자면 '네가 죄인이다. 그러니 이런 고통을 받는 것이다. 회개하라.'이다. 인과응보의 가치관이다.


욥기 마지막에 드디어 하나님이 욥과  대화를 나눈다.

'무지한 말로 생각을 어둡게 하는 자가 누구냐? '로 시작해서 하나님의 존재는 인간의 이성이나 경험으로 다 알 수 없는 존재임을 드러낸다. 즉, 앞서 욥을 찾아온 이들의 논리를 무너뜨린다. 인과응보만이 하나님이 선택한 인간사 치리(治理)의 방법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기에 인간이 생각하는 '인과응보적인 관점'에서의 희로애락이 하나님 앞에서는 의미가 사라진다. 전능자의 주권이 우리 삶을 다스린다. 우리가 소망을 둘 수 있는 것은 그가 미쁘시고(faithful) 공의로운(righteous) 존재시라는 점이다.


불운에 대하는 자세를 '네(내)가 한 잘못. 죄'에 대한 정죄로 두고 있는가? 때로는 그게 피할 수 없는 사실로 느껴지는 상황도 있다. 하지만, 살면서 만나는 무수한 불운을 그렇게 생각할 수만은 없다. 그리고 '불운'이라부르는 일들도, 지극히 현세적인 바탕에서 재단된 개념들이 아닌가.


예수님은 자기 잘못도 아닌 인류의 죄 사함을 위해, 그를 구세주로 인정하지도 않는 인간들의 손가락질과 조롱을 밭아 죽어야 하는 운명, 인간적인 눈에는 '불운'의 운명을 가지고 이 땅에 오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담담히 그 길을 걸었다. 그것이 주어진 사명이기에.


어머니에게 이 질병이 벌인지 아닌지 그건 인간인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자녀 된 삼 남매에게도 마찬가지다.

이것을 사명으로 받아들이자. 어머니에게는 어머니에게 말씀하는 하나님의 음성이 있을 것이다. 이 병을 견디며 죽음으로 나가는 것이 어머니에게 주어진 사명이고, 나에게는 그 어머니 곁에서 내 몫의 최선을 다하는 것이 사명이다. 그 길에 필요하다면 회개를, 필요하다면 간구를 드리며 더 가까이 인생의 주인 되신 분께 나아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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