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李씨(이하 이): 유튜브에서 우연히 톨스토이 문학론 강연을 듣게 되었는데, 강사님이 이 장면을 언급하시는 거야.
들으면서 바로 마음에 그 장면이 와서 담기더라고. 안나 카레니나에 나오는 일화인데, 귀족인 레빈이 인부들과 함께 풀을 베다가 무아지경의 경지, 그러니까 자기를 완전히 잊은 채 낫이 저절로 풀을 베는 순간의 행복을 만나지.
점선명(이하 점): 그럼, 오늘의 주제는 무아지경인가?
이: 조금 다른 단어를 사용해 볼까, '몰입'이라고.
점: 그 단어도 이미 잘 알려진 듯한데, 교육분야에서.
이: 그렇지. 미하이칙센트미하이의 flow로 알려져 있지. 직접 책을 읽은 적은 없지만, 교육 관련 연수에서 종종 등장한 덕분에 이름과 용어가 친숙해.
점: 그럼 오늘은 이 씨의 몰입과 무아지경에 대한 이야기가 되겠군.
이: 흠..... 그런 셈인데, 레빈의 이야기로 돌아갈게. 레빈은 여기서 정신적 노동이 아니라 육체적인 집중과 반복이 지속되고 있거든. 나의 경험과 겹쳐지는 부분이 있어서, 탁! 기억에 불을 켜주는 거야.
내가 경험했던, 그러나 글로 옮겨보려고 생각한 적은 없었던 감각, 정신적, 육체적인 상태를 톨스토이는 이렇게 형상화했구나,라는 충격과 감동이 있었어.
점: 이 씨도 레빈처럼 풀을 베었나?
이: 레빈은 귀족청년이라 매일 들판에서 일하는 게 아니었지만, 나는 농촌에 사는 농부의 딸이었으니까 어려서부터 밭일을 도왔지.
벼를 키워 쌀을 얻는 논농사와는 다르게, 제주도에서는 척박한 땅에 농작물을 심어 수익을 내려다보니, 해마다 여러 가지 작물들을 바꿔가면서 키웠거든. 손하나도 아쉬운 농번기에는 아이들 손이라도 빌려 일해야 했어.
이렇게 말하니, 정말 올드한 세대 같은데, 학기 중에 '농번기 방학'이라는 게 있었어. 부모님 도와서 밭일을 하라고 방학이 있는 거야.
점: 지금은 생각할 수 없는 일이네.
이: 그렇지. 국민학교 입학하기 전에는 '농번기 탁아소'를 다녔... 아이쿠야, 이 단어를 이해할는지.
점: 뭐, 대한민국 50대 중년들이 다 도시생활만 했겠나, 시골출신들은 공감할 거야, 계속해봐.
이: 하여튼, 시골에서 자란다는 건, 부모님들의 노동과 분리되지 않은 삶이지. 얼마나 그분들이 많은 땀을 흘려가며 생계를 위해 애쓰는 지를 보고 자란다는 거야.
그래서, 어린 나이지만, 주어진 노동을 피하고 싶은 마음이 있더라도, 해야 했고.
그렇게 밭에 나가서, 농작물들을 심고 키우고 수확하는 일을 곁에서 돕는 거지.
대학교 때에도 '농활'한다는 얘기가 들려도, 내가 집에 돌아가면 자연적으로 하는 일이 '농촌봉사활동'이니까, 그들의 '농활'이 진지하고 아름답게 보이지 않더라고.
좀 삐딱했나 봐, 내가. 손님인 그들이 얼마나 그 땅 토박이 사람들의 애환을 알 수 있을까, 정녕 그것에 진실한 관심이라도 있을까 해서 말이지.
점: 음, 그래서 이 씨는 고향으로 돌아가서 농활을 했나?
이: 그렇지. 부모님을 도와서. 몇 학년때인지는 정확히 생각이 나지 않는데, 그 해 여름, 정말 더웠어.
보리추수를 하는데, 낫을 가지고 보릿대를 잘랐거든. 근데, 정말 레빈의 풀베기 같은 상태가 되는 거야. 물론 콩을 따거나, 깨대를 베거나, 마늘을 뽑거나, 유채를 베거나, 땅콩을 뽑는 등등 아무튼 반복적인 동작이 계속되다 보면 느낄 수 있는 무아지경의 상태는 경험했었지만, 그해 보리밭에서는 어찌나 지독하게 땀을 흘리며 일했던지.
더위와 육체노동의 고통을 잊어버리기 위한 방법이 낫과 내가 하나가 되어서 눈앞에 보릿대를 베어내는 그 하나의 일에만 몰두하는 거였어. 그러다, 어느 순간 정신이 돌아오는 거야.
일이 마무리될 때쯤에는 얼굴에 소금결정이 서걱대는 것 같은 기분이었어. 거울을 보니 땀과 기름이 빠져나가서 피부가 쭈그러져있었을 정도였어.
점: 그런 경험이 있으니, 레빈의 풀베기 낭독을 듣고 옛 생각이 났겠네.
이: 응. 그냥 내 몸이 움직이던 움직임을 그대로 반복하면서 바로 내 눈앞에 있는 그 하나에 집중하며 나아가는 거.
싫은 감정도 기쁜 감정도 없이, 모든 감정에서 놓여나서 바로 해야 하는 그 일에 몰두한 상태.
정신은 몸에 매여있을 것 같으나 오히려 자유롭고, 내 몸은 내 생각과 별개로 자기의 일을 수행하고 있는 상태말이지.
점: 그럼, 글쓰기의 몰입과는 조금 다를까?
이: 다를까? 어떨 때는 쓰다가 멈추고 생각, 멈추고 거기까지 쓴거 읽어보기, 멈추고 뒤적거림이 필요할 때도 있지만 또 어떤 때는 생각보다 손이 먼저 움직이며 타이핑하는 것 같은 때도 있으니. 딱히 하나로 어떻다 말하기는 어렵네.
하지만, 그런 멈춤이 있더라도 생각은 한 곳을 향해, 그러니까 쓰고 있는 글의 흐름과 결말을 향해 가고 있으니 크게는 몰입의 파도 속에 있다고 봐야겠지. 시간이 어떻게 지나는 지를 잊어버리니까.
점: 육체노동의 몰입, 그리고 정신노동의 몰입, 둘 다 가능한 거네, 이 씨의 경험을 따르자면.
이: 그렇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창의적인 정신 활동이 주는 몰입감이 참 좋아.
한 학기에 두 번씩 시험 문제를 출제해야 하는데, 그게 엄청 부담스럽거든. 미루고 싶기도 하지만, 어쨌든 해내야 할 일이라서 덤벼들고, 시작하게 되면 정말 초몰입의 상태를 경험하는데, 이게 나름 성취감을 주는 거야.
어떻게 문제를 낼까 궁리궁리하고, 이렇게 저렇게 바꿔도 보고 생각해 보면서 문제를 만들어 내고 선택지까지 완성하면서.
내가 어렵고 피하고 싶던 일이지만, 끝내는 거기서 어떤 희열을 맛보는 게, 아이러니야.
아, 어렵고 피하고 싶던 일을 해냈으니, 거기서 희열이 있는 건가, 아무튼.
점: 여기 브런치스토리에 글을 쓰는 작가님들도 글을 쓰는데 어떤 희열이 있는 분들이겠지? 그렇지 않고서야, 이곳에 머물러 계실까.
이: 그래, 글쓰기의 열정을 담아 정성껏 글을 쓰는 작가님들께 존경의 마음을 표해드리며 마무리해야겠네.
브런치스토리 오가며, 덕분에 좋은 글들 감상합니다.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