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마다의 시간에 피어나라
a late bloomer_ 늦게 피어나는 꽃
이李씨(이하 이): a late bloomer, 예쁜 영어 표현이라, 이걸 말해 볼까 해.
점선면(이하 점): '늦게 꽃 피우는 자' 이니까 우리말 대기만성-큰 그릇은 오래 걸려 만들어진다-정도로 이해하면 될까?
이: 음, 나는 약단 다르게 생각하고 싶어.
'큰 그릇'이라는 말 자체가 어떤 기준이 있고, 그것과 비교하여 '크다'라는 판단이 나오는 거라서.
저 영어 자체로는 '비교하여 크다'라는 뜻을 담은 건 아니라고 봐.
내가 어느 날 점심, 학교 건물 앞 화단 앞을 지나고 있었어. 화단에 심은 장미 나무에 장미 꽃송이들이 뭉실뭉실 달려있었어.
빛깔 하며 자태 하며, 향기까지 정말 유혹적이더군. 가까이 가서 가만히 쳐다보고 싶더란 말이지.
반은 최면을 당한 기분으로 장미나무 가까이 가서 꽃송이들을 살펴보는데, 이게 신기한 게 한 나무뿌리에서 자라나 가지마다 꽃송이들이 달려있는데, 어떤 것들은 한창 제철로 온 꽃잎을 다 열어 피어났고, 어떤 꽃봉오리들은 아직도 애기인 거라.
점: 우리 이씨가 거기서 뭔가 깨달음을 얻으셨구먼.
이: 그렇지. 이게 시간이 좀 지난 일이야. 그때 나는 장미나무 앞에서 이런 메시지를 들었어.
'꽃들은 저마다의 시간에 피어난다'
'먼저 화려하게 피어나는 꽃송이는 주목을 받고, 경탄의 대상이 되겠지만, 그 사이 천천히 자신을 키워 피워낼 준비를 하는 꽃송이도 있다.'
교직에 있으면서 각양각색 학생들을 만나왔어.
공부를 잘한다는 학생들도 조금만 자세히 살펴보면, 그 결이 달라.
반짝반짝 빛나는 호기심과 명석한 두뇌로 자기 동기화가 되어서 공부하는 학생들은, 성적을 잘 받아야 한다는 강요 혹은 외부적인 요인에 쫓겨 공부하는 아이들과도 다른 게 보여.
혹, 너무 자기 목표가 크면 이 친구들도 스스로 강박적으로 성적에 집착하기도 하지만. (문제 하나 틀려서 올백이 안되던 것때문에 속상해서 울었어요.... 하는 이야기를 들어봤나?)
결과이전에, 그런 친구들은 그냥 배움에 대한 열망이라는 게 자기 안에 살아 있는 아이들이라, 공부에 스스로 덤벼드는 자세가 있다고나 할까. 넘사벽의 수재들이지.
이런 아이들은 부모님이 어떻건 간에 자신의 지적호기심과 성취를 만족시키기 위해 정진하는 자세를 태생적으로 가지고 태어난 경우라 할 수 있어.
물론 거기다가 좋은 부모님을 만나면, 금상첨화겠지. 아이의 배움의 열망을 활활 타오르도록 충분한 연료를 넣어줄 수 있을 테니까.
안타까운 건 아이가 품고 있는 열망의 그릇에 비해, 과도하게 부모님들이 연료를 쏟아붓는 경우야. 불이 타오르긴 하는데, 이게 아이를 다치게 한단 말이지.
본인의 자녀가 어떠한지를 생각하지 않고, 넘사벽 수재의 기준에 맞춘 기대, 원하지도 않는 지나친 후원? 과 지도. 거기다가 가장 안타까운 건, 일찌감치 꽃 피운 다른 아이들과의 비교.
내가 왜, 이런 얘기를 하겠어? 내 아이들이 넘사벽의 수재라면 아마 나는, 내 아이라서 자랑스럽다며 마음 한구석에 교만하고 으쓱한 마음을 가졌을 거야. 그런데, 참 감사하게도 자식이 부모마음처럼만 되지 않는다는 걸 가르쳐주시더라고. 학창 시절의 나를 생각하면 내 자식도 이러이러할 것이라는 예측이 전혀 들어맞지 않는 상황들을 만나게 하면서.
점: 사춘기 아이들과 갈등이 심했나?
이: 아니, 아이들과 갈등한 게 아니라, 내가 내적 갈등을 했지.
어떻게 나는 현명하고 지혜로운 부모가 되어서 이 시간들을 지나갈 수 있을까 하고. 어른이라고, 부모라고 쏟아붓고 싶은 내 철학, 내 충고들을 붙들어 두기 위해서. 그 끝이 비난의 말이 되지 않기 위해서.
농경사회에서 자란 내가, 이제 어떻게 달라질지 모르는 세상을 살아갈 아이에게 지나 온 내 경험을 두고 인생의 훈수를 두는 것 자체도 우습기도 하지.
내 경험이라는 것도 얼마나 빈약하기 그지없냐고. 미래에 대한 책을 읽고 생각할수록, 성적 너머의 요소들이 더 중요하고 보이더라고.
학창 시절에는 성적이 좋으면 그걸로 빛나보일 수도 있지만, 사회에 진입해서 살아갈 때는 그것만이 전부가 아닌 거라.
아들이 군대에서 '좋은 대학'이 가지는 후광효과를 목격해서 인가, 이제 와서 고등학교 때 공부를 조금 더 열심히 할걸 하는 후회를 하던데, 그것이 우리 아들의 때라고 생각해.
후회도 자신의 몫이고, 스스로 느끼고 스스로 결정하고, 스스로 계획을 세우고 실행할 수 있으면 되었다, 이렇게 생각하는 거지.
그런 시행착오를 없애주겠다고 한 발 앞서 길을 닦아주는 부모의 뒤에만 서서 쫓아간 아이들, 글쎄, 언젠가는 이렇게 스스로 질문하지 않을까?
이것이 나의 선택이었던가? 이것이 나의 길인가? 하고 말이야.
그러니, 아직 여물지 않은 장미꽃봉오리를 내가 얼른 피어나게 하고 싶다고 잡아 뜯으면 어떻게 되겠어?
.
.
.
기다림.
기다림이 필요한 거였어.
잘 자랄 만큼의 양분을 제공하면서, 제 힘으로 자신을 열어 세상을 마주할 때까지.
점: 다른 모든 부모들이 이 씨의 생각에 동의하지는 않을 수도?
이: 그렇겠지. 근데, 모든 이와 동의를 이룰 필요가 없잖아.
꽤 오래전 일이지만 그때 받은 충격 때문에 잊히지 않는 말이 있어. 한 교원 연수에서 강사가 이런 고백을 했어. '자기가 고3담임이던 때, 첫날 아이들을 만나 첫 대면에서 이렇게 얘기했다고. 너희들은 앞으로 대학시험을 치를 때까지 인간이 아니다. 너희들은 공부하는 기계다.라고 말했었다고.(그때는 수시 제도가 없었으니, 더더욱)'
기계는 성능으로 평가를 받으니, 성능이 좋은 기계는 우수, 성능이 좋지 않으면 불량이라 부를 테고, 그러니 그 시대에 학생들은 성적으로 자신의 효용을 평가받았겠지. 지금은 달라졌을까?
지금은 달라져야 하는 거 아닐까? 그 다름의 문화는 누가 만들어내는 거지?
어른들-학부모, 교사-이 먼저 만들어줄 수 있어야 한다고 봐. 아이들은 거의 선택의 자유가 없이 어른들이 만들어 놓은 세계의 틀로 진입해 들어올 수밖에 없으니까.
점: 이씨, 과열되고 있는 거 같아. 조금 진정....
이: 휴~ 그러게.
성적 때문에 풀죽고, 성적 때문에 걱정하고, 시험 때문에 절절매는 아이들을 보면서 느낀 측은함 때문인지도.
또 성적으로 재단되는 자신의 정체를 피하려고 의도적인 나태함에 빠지는 친구들도 있기에. 학생들에게 성적은 정말 무시할 수 없는 존재이지.
점: 이씨의 생각을 요점으로 말해주게, 글이 너무 길어지고 있어.....
이: 자기 아이가 잘못하는 걸 잘하게 해주고 싶어 하는 부모님들이 있지. 미술을 못하니까 미술학원에. 축구를 못하니까 축구학원에.
자, 생각해 보자. 이렇게 해서 아이들은 행복감을 느낄까? 아마, 아닐걸.
미술을 잘하니까 미술을 하게 해주고, 축구를 잘하니까 축구를 하도록 해야 아이들은 자기가 꽤 괜찮은 사람이고, 잘하는 게 있다고 느낄 거야.
그 힘이 쌓여서 나중에는 자기가 어렵고 싫던 일도 도전해 볼까 하는 마음이 생기지 않을까? 자신에 대한 믿음이 있으니까, 실패해도 다시 일어날 수 있고 도전도 가능하지.
공부를 못하니까, 공부를 안하니까 공부만 계속 시키고 있으면, 자... 어떻게 될까? 그 이상은 얘기 안 할게.
점: 잘하는 것이 더 빛나도록 해주기. 잘하는 것을 잘한다고 인정해 주기?
이: 음. 그러면 그게 그 아이의 때에 빛나도록 아름답게 피어날 수 있을 거야.
early bloomer도 late bloomer도, 저마다의 시간에 행복하게 피어나면 좋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