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

by 수환

순간 사방이 고요의 늪에 잠겼다. 눈을 감은 샌드라는 생의 피로를 벗어던진 듯 평온해 보였다. 오직 그녀의 안에서 짐승처럼 헐떡이던 거친 호흡만이 마지막 방해꾼으로 남아 있을 뿐이었다. 맞잡은 손에서 온기가 빠져나가며 힘없이 허물어졌다. 이윽고 뺨 위로 투명한 흔적 하나가 길게 사선(斜線)을 그으며 흘러내렸다. 숨이 멎은 자리로 눈물이 지나갔으나, 정작 그 얼굴 어디에도 죽음의 기미는 그림자조차 드리워져 있지 않았다.

남겨진 자들만이 슬픔의 허기를 견디지 못한 채, 무너져 내리는 가슴을 부여잡고 생의 아득한 벼랑 끝에 서 있을 뿐이었다.



“아파?”

그녀는 오래전 가뭄이 든 우물처럼 메말라 있는 제 안쪽으로 낯선 생의 침입이 스며드는 것을 끝내 수긍하지 못하는 듯했다. 통증을 내뱉는 그녀의 마른 목소리 앞에서 우리의 관계는 매번 원만한 합일에 이르지 못한 채 겉돌았다. 어둠이 내려앉은 방 안에서 시계의 초록색 초침만이 명료한 빛을 발하며 시간의 뼈마디를 자르듯 무심히 돌고 있었다. 그녀의 몸에서 떨어져 나온 나의 육신은 채워지지 않는 허기를 견디며 침대 곁으로

물러났다. 서랍 깊숙이 박혀 있던 해묵은 말보로 한 대를 꺼내 불을 붙였다. 폐부 깊숙이 파고드는 독한 연기가 비로소 들끓던 흥분을 가라앉히고 미지근한 고독을 불러들였다. 창밖은 여전히 완강한 어둠이었고, 생의 새벽이 당도하기까지는 아직도 지루한 시간이남아 있었다.



“과장님, 어제 말씀하신 고객 자료 찾았습니다.”

수화기 너머 길영 대리의 목소리가 이른 아침의 정적을 깨고 침입해 왔다. 휴가라는 명목으로 잠의 늪에 깊이 가라앉아 있던 나를 건져 올린 건 그의 다급한 전언이었다. 개발 부서로 넘기기 전 자료를 검토해 보강하겠다는 그의 말 위로, 숫자로 치환된 세상의 속도감이 어지럽게 겹쳐졌다. 80년대 초 볼커가 밀어 올린 금리의 파동이 한국 시장의 서민들에게 재산형성이라는 낯선 희망을 심어주던 시절이었다. 경쟁사들은 여전히 이자율의 숫자를 바꾸며 숨 가쁘게 뒤를 쫓고 있었다. 하지만 내게 그 숫자들이란, 단지 멀리서 들려오는 마른천둥소리처럼 현실감이 없었다.

“그래, 문제가 생기면 바로 연락하게.”

전화를 끊자마자 명치끝을 훑고 지나가는 속 쓰림에 이불을 박차고 일어섰으나, 어제 마신 술의 잔해가 아직 무릎에 고여 있었던지 두 다리가 속절없이 꺾였다. 바닥에 주저앉아 바라본 방 안은 두꺼운 푸른색 커튼에 가로막혀, 빛도 어둠도 아닌 모호한 빛깔로 침전해 있었다. 내가 빠져나온 침대 위에는 뒤틀린 이불만이 뱀의 허물처럼 흉물스럽게 널브러져 있었다. 그 틈바구니에 양말 한 짝이 외따로 떨어져 있었다. 아이보리색 바탕에 연두색 네 잎클로버가 수 놓인, 몇 년 전 압구정 백화점에서 아내가 골라주었던 물건이다. 이제 방안에는 나뒹구는 양말을 두고 잔소리를 얹어줄 생의 목소리가 존재하지 않는다. 씻지 않은 채 웅크리고 잠든 나를 깨워 몸을 펴고 자라고 다독여주던 그 서늘하고도 따뜻한 간섭이, 이제는 영영 도달할 수 없는 저편의 일처럼 아득해졌다.


“우리가 헤어지면, 그때도 친구처럼 지낼 수 있을까?”


아내는 습관처럼 그 말을 입술 위에 얹어두곤 했다. 지금의 생(生)이 낡은 옷처럼 버겁다고, 만약 우리가 갈라선다면 그 뒤엔 아득한 그리움만 남게 될 것이라고 그녀는 덧붙였다. 그리움의 부피는 커져만 가는데 정작 한 공간을 점유하고 싶지는 않다는 그 모순된 갈망의 기저에는 도대체 무엇이 고여 있는 것일까. 그녀가 그런 말을 내뱉을 때마다 나는 이유를 묻는 대신, 밤의 정적 속에서 그 문장들을 천천히 씹어 삼키며 되새김질할 뿐이었다. 우리는 애초에 서로의 홈을 맞추지 못한 채 헛돌기만 하는 자물쇠와 열쇠 같은 사이였는지도 모른다. 결코 열리지 않을 문 앞에서 서로의 무늬만 만지작거리다 저물어가는, 그런 가여운 인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