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

by 수환


“형, 잘 지내요?”
모처럼의 휴일, 늦은 오후의 눅눅한 정적 속에서 나는 어제의 흔적들을 지워나가고 있었다. 바닥에 내팽개쳐진 맥주병과 와인병들이 생의 허물처럼 뒹굴었고, 식어버린 잡탕밥과 울면의 잔해들이 담긴 그릇에서는 비릿한 냄새가 올라왔다. 그 난장판 속에서 수연의 전화가 걸려온 것은 내가 막 마지막 쓰레기봉투를 묶으려던 찰나였다. 홀로 남겨진 사내의 누추한 시간을 수연의 목소리가 조심스럽게 파고들었다.
“현재랑 며칠 전에 통화했어. 너희, 별일 없는 거지?”
“걱정 마세요. 현재 그 사람 성격 알잖아요. 기자 생활의 팍팍함에 조금 지쳐 있을 뿐이에요. 시간이 지나면 어떻게든 그 생리에 적응하겠죠. 그나저나 형, 한국을 떠날 생각을 하고 있다면서요? 정말인가요? 역시 주희 언니 때문인가요?”
“그 녀석, 참지 못하고 별소리를 다 했군.”
나는 전화를 어깨에 괸 채 잠시 손을 멈추고 창밖의 흐릿한 하늘을 바라보았다. 누군가의 이름을 입 밖으로 내뱉는 것만으로도 가슴 한구석이 서늘하게 비어 가는 기분이 들었다. 주희. 그 이름은 내게 이미 지나온 계절의 흔적이었으나, 동시에 여전히 나를 이 땅에 발붙이지 못하게 만드는 아득한 진원지이기도 했다.

나의 사직서를 건네받은 정 부장은 잠시 입술을 다물더니, 대화를 좀 나누자며 나를 이끌고 복도 끝 작은 회의실로 들어갔다. 그곳의 화이트보드에는 앞서 다녀간 이들이 남긴 해독 불가능한 도표와 흘려 쓴 숫자들이 어지러운 무늬처럼 가득 차 있었다. 조금 전 복도를 지나며 들었던, 누군가를 향한 날 선 호통 소리가 환청처럼 귓가에 맴돌았다. 조직이라는 거대한 기계가 내뱉는 불만 섞인 마찰음 같은 것이었다.
정 부장은 자리를 권하며 커피 대신 말보로 한 대를 내밀었다. 마흔다섯의 나이, 동기들보다 앞서 나가는 순조로운 진급과 안팎으로 원만한 평판을 유지해 온 그였다. 그는 평소답지 않게 아들의 유학 이야기를 꺼내놓으며, 내 이별의 무게를 조금이라도 덜어내 보려 애쓰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내뱉는 사적인 이야기들은 공중에 흩어지는 연기처럼 어색하고 무거웠다.
“부장님, 오랫동안 고민했습니다. 이민을 결정하기까지 제 안에서 수많은 허기와 갈등이 교차했습니다.”
폐부 깊숙이 빨아들인 담배 연기를 천천히 내뱉으며, 나는 소파의 눅눅한 깊이 속으로 침전되어 있던 몸을 일으켜 세웠다. 정 부장은 단호하면서도 결코 날카롭지 않은 음성으로, 마치 오래전부터 예견된 일을 확인하듯 나지막하게 물었다.
“자네의 신중함을 모르는 바 아니네만, 그래도 자네가 내민 것이 사직서일 줄은 몰랐군. 그래, 어느 나라로 가는가?”
“캐나다로 정했습니다. 먼저 자리를 잡은 선배가 있어 그곳의 생리(生理)에 적응하는 것이 조금은 수월할 듯싶어서요.”
“철저히 알아봤겠지. 언제쯤 떠나는가?”
“두 달 뒤입니다.”
“생각보다 서두르는군. 가기 전에 다시 한번 자리를 만듦세. 그동안 고생 많았네.”
그가 내민 손은 건조하면서도 따뜻했다. 나는 그 손을 마주 잡으며, 감사했다는 짧은 인사말을 공중에 남긴 채 회의실을 빠져나왔다. 등 뒤로 닫히는 문 소리가 마치 한 생의 단락이 끊어지는 소리처럼 아득하게 들려왔다.


한국을 떠난 비행기는 겨울의 나리타 공항에 내려앉았다. 1987년 2월, 한반도 영동 지방에는 18년 만의 폭설이 내려 모든 것이 마비되었다던 그해 겨울이었다. 혹여 출장 일정이 취소될까 염려했으나, 하늘은 제 할 일을 하듯 무심하게 비행을 허락했다. 동경 지사 주재원이던 동기 상혁과 후배 미정은 공항까지 나를 마중 나왔고, 한참을 달려 도착한 시내의 어느 식당에서 “가장 한국적인 음식”이라며 규동을 권했다. 얇게 썬 소고기를 간장 소스에 졸여 달걀노른자에 비벼 먹는 그 덮밥은 불고기와는 다른, 낯설면서도 부드러운 맛의 경험으로 내 기억에 남았다.
다시 찾은 나리타 공항의 풍경은 몇 년 전과는 사뭇 달랐다. 서울의 매서운 겨울과는 달리 동경은 이미 봄의 문턱에 들어선 듯 온화했고, 새롭게 장만한 겨울 잠바는 오히려 거추장스러운 짐짝처럼 느껴졌다. 나는 지금 캐나다 토론토로 가는 비행기를 기다리고 있다.
“お客様、弊社の飛行機をご利用いただき、ありがとうございます.” (손님, 저희 회사 비행기를 이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チェックイン(搭乗手続き)をお手伝いいたします.” (체크인을 도와드리겠습니다)."


창가에 기대어 눈을 감고 있던 나를 옆자리에 앉은 백인 청년이 흔들어 깨웠다. 눈을 뜨자 승무원이 다가와 무엇을 마시겠느냐고 물었다. 호주에서 왔다는 청년은 캐나다의 친구를 만나러 가는 길이라며 해맑게 웃었다. 그 웃음을 보며 나는 문득 이념 대립의 최전선에서 자유와 권리를 쟁취하기 위해 휘둘러대던 몽둥이, 청명한 4월의 하늘이 입체적으로 다가오던 순간, 다리를 끌며 군중 속으로 사라지던 수연의 다급한 외침 “형!”을 귓전에 다시 들렸다. 스무일곱 청년의 그 가벼운 발걸음이, 이유 모를 부러움으로 다가왔다. 어쩌면 나는 영영 그 시절의 수연에게서, 그리고 잃어버린 생의 좌표에게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출국을 하루 앞둔 밤이었다. “그냥 우리랑 살자, 꼭 떠나야겠니. 여기서 우리랑 같이 살자니까!” 어머니는 눈물로 얼룩진 안색을 수건으로 연신 훔쳐내며 가여운 애원을 멈추지 않았다. 곁에 앉은 아버지는 내내 침묵의 늪에 빠져 있었다. 이혼 후 생의 궤도를 이탈해 방황하던 아들이 던진 이민이라는 선언은 그들에게 분명 감당하기 어려운 낙인이었을 터였으나, 노인은 그저 묵묵히 그 고통을 받아내고 있었다.
“네 마음이 편해진다면 그걸로 됐다. 하지만 너무 오래 있지는 말거라.”
아버지가 내뱉은 마른 문장 위로 담배를 든 손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미처 털어내지 못한 담배꽃이 허물처럼 바닥으로 낙하했다. 그것은 마치 우리가 함께했던 시간의 잔해처럼 보였다.


“형, 정말 떠나는 거야?”
전화기 너머 수연의 목소리는 이미 울음의 습기에 젖어 있었다. 콧물을 훌쩍이는 소리가 고독한 방 안의 정적을 비집고 들어왔다. “네가 이러면 현재에게 미안해지잖니. 현재가 너에게 쏟는 무조건적인 애정을 잊어서는 안 돼.”
“그이도 알잖아, 내가 형을……” 수연이 문장의 끝을 맺기도 전에 나는 그녀의 말을 냉정하게 가로챘다. “그런 소리 하지 마라. 다 흘러간 과거일 뿐이야. 너희 둘, 부디 원만하게 잘 지내길 바란다.”
“내일 공항으로 마중 나갈게.”
“쓸데없는 소리. 이건 도망치는 게 아니라, 나라는 존재를 낯선 곳에 내던져 다시 시작해 보려는 것뿐이야. 그러니 부디 잘 살아라.”


전화를 끊는 순간, 가슴 한쪽에서 살점이 뜯겨 나가는 듯한 통증이 밀려왔다. 그 뜯겨 나간 살점은 허공을 선회하다가 결국 부메랑이 되어 돌아와 내 가슴에 다시 박혔다. 한동안 그 아픔을 견디지 못해 허덕이던 수연의 모습이 환영처럼 눈앞을 스쳤다. 이제 이 땅의 기억들은 깊은 흙 속에 묻고, 자물쇠를 채워 영영 수몰시켜야 할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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