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샌드라가 토론토에 와 있다고요?”
성삼 집사의 목소리는 수화기를 타고 넘어와 내 안의 가라앉아 있던 기억을 건드렸다. 자신의 본명이 정성혜라고, 마치 유언처럼 한국 이름을 남기고 영영 돌아오지 않을 사람처럼 떠났던 그녀였다. 그런 그녀가 몇 년의 세월을 돌아 다시 이 도시에 당도했다는 것이다. 집사는 그녀가 이혼을 하고 혼자 지내고 있다는 말을 덧붙였다.
그녀의 결혼 생활이 결코 눅눅하지 않았으리라는 것은 짐작하기 어렵지 않았다. 약혼 후 홀로 캐나다로 떠나버린 그녀를 향한 시댁의 시선은 늘 서늘하게 식어 있었고, 자유분방한 서구적 자아를 지닌 그녀를 한국의 가부장적인 정서로 감당하기란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성삼 집사는 그녀의 연락처를 건넸지만, 나는 끝내 번호를 누르지 않았다. 그녀가 이곳에 왔으면서도 내게 연락하지 않은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 침묵 또한 그녀의 삶의 방식이라면 나는 그것을 존중해야 했다. 푸시킨이 노래했듯, 모든 것은 순간적인 것이고 또 지나가는 법이다. 나 역시 그녀와의 시간을 그저 흘러가는 생의 한 대목으로 간직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승호, 점심 먹으러 가자.”
동료 카다치가 내 어깨를 툭 치며 말을 건넸다. 중학생 두 딸을 둔 그는 이민자로서의 동질감 때문인지 영어가 서툰 내게 늘 먼저 손을 내밀어주던 친구였다. 우리는 회사 근처 식당에서 끼니를 때우고, 식후의 나른한 햇살을 받으며 도심의 건물 사이를 산책하곤 했다. 여자친구가 있느냐는 그의 무심한 질문에, 나는 찰나처럼 샌드라의 얼굴을 떠올렸다.
‘샌드라가 토론토에 와 있지. 어쩌면 그녀도 나의 연락을 기다리고 있는 건 아닐까.’
가게 서랍 어딘가에 넣어두었던, 그녀의 번호가 적힌 쪽지가 환영처럼 머릿속을 스쳤다. 성삼 집사가 소식을 전해준 뒤로 벌써 몇 달이 흘러 있었다. 그동안 침묵으로 일관한 나를 보며 집사는 아마도 내가 무심한 사내라고 생각하고 있을 터였다. 하지만 인연이라는 것은 억지로 매듭지으려 할수록 엉키는 법이다. 나는 카다치의 질문에 대답 대신 그저 멀리 보이는 온타리오 호수의 물빛을 닮은 하늘을 바라보았다. 샌드라, 혹은 정성혜. 그녀는 지금 이 도시 어느 갈피에서 어떤 표정으로 흐르고 있을까. 나는 다시 푸시킨의 구절을 곱씹으며 낯선 거리의 소음 속으로 걸음을 옮겼다.
“네? 샌드라가 토론토에 와 있다고요?”
성삼 집사의 목소리는 정지해 있던 내 시간의 태엽을 느닷없이 감기 시작했다. 자신의 한국이름이 정성혜라고, 마치 생의 한 부분을 떼어내주듯 고백하고 떠났던 그녀였다. 몇 년의 세월을 돌아 그녀가 다시 이 도시에 당도했다는 소식 뒤에는, 이혼이라는 해조음 같은 쓸쓸한 갈무리가 따라붙었다.
그녀의 결혼 생활이 결코 눅눅하지 않았으리라는 것은 짐작할 수 있었다. 약혼자 신분으로 홀로 캐나다로 떠나버린 그녀를 향한 시댁의 시선은 늘 마른 장작처럼 서늘했을 것이고, 서구의 자유로운 공기 속에서 자라난 그녀를 한국적 정서의 틀로 가두기란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었을지 모른다. 나는 연락처를 받았지만 번호를 누르지 않았다. 그녀가 먼저 연락하지 않은 데에는 그만한 침묵의 이유가 있을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푸시킨의 말처럼 모든 것은 순간적인 것이고 또 지나가는 법이니, 나 또한 그 인연을 흐르는 물결 위에 그대로 두려 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의 그 오만했던 무심함은 오래가지 못했다. 다시 걸려온 성삼 집사의 전화는 내 영혼의 밑바닥을 사정없이 흔들어 놓았다. 그녀가 병원에 입원했다는 소식은 후회라는 이름의 날카로운 파편이 되어 가슴에 박혔다. 몇 년 전, 차마 붙잡지 못하고 놓아버렸던 그녀의 가냘픈 손마디가 환영처럼 눈앞을 스쳤다. 그때 내가 그녀를 보내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지금 어떤 계절을 지나고 있었을까.
병원 침상 위에 누워 있는 그녀의 얼굴에는 내가 모르는 세월의 무늬가 깊게 패어 있었다. 잠든 그녀를 지켜보는 내내 미안함이라는 해묵은 감정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샌드라, 제발 이 차가운 침대 위를 털고 일어나.' 나는 요동치는 심장을 겨우 부여잡으며 마음속으로 외치고 또 외쳤다.
얼마나 지났을까, 서서히 눈을 뜬 그녀가 예상치 못한 나의 방문에 한동안 나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이윽고 그녀의 창백한 입술 사이로 "오빠"라는 한마디가 힘겹게 새어 나왔고, 그와 동시에 그녀의 눈동자에 고여 있던 시간이 눈물이 되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마주 잡은 손은 자석처럼 서로를 끌어당긴 채 한동안 떨어질 줄 몰랐다. 어떤 말도 필요치 않았다. 그 고요한 접촉만이 우리가 통과해 온 그 길고 굽이진 시간들을 비로소 위로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