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접

by 수환

시간은 잔인할 만큼 아물지 않을 것 같던 이별의 흉터를 기어이 지워냈다. 뱀이 낡은 허물을 벗어던지듯, 계절은 땀에 전 얇은 생의 흔적들을 매몰차게 몰아내고 옷장 깊숙이 유폐되어 있던 두터운 질감들로 몸을 감싸게 했다.


"승원, 기쁜 소식이야. 고객사에서 면접을 보자고 하네. 다음 주 수요일 오후 2시 어때?"

필리핀 에이전트 마이크로부터 온 전갈이었다. 한국의 '빨리빨리'라는 조급증에 길들여졌던 이민 초기, 캐나다의 그 아득하고 느린 문법은 견디기 힘든 답답함이었으나 이제는 그마저도 익숙한 풍경이 되었다. 몇 달이나 지난 뒤에야 당도한 에이전트의 연락은 그 지루한 속도의 정점이었다. 그는 차분하게 질문에 답하면 아무 문제없을 거라며,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기별하라는 당부를 잊지 않았다.


사표를 던지고 언어와 풍토가 다른 대륙으로 몸을 옮겨왔지만, 생을 지속하는 방법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았다. '그래, 나도 한국에서 직장이라는 곳을 다녔었지.'

아침이면 정갈하게 슈트를 차려입고 돌아갈 곳이 있었다. 동료들과 떼를 지어 식당가를 배회하고, 상사의 기색을 살피다 퇴근길 선술집에서 소주 한 잔에 울분을 털어내던 나날들. 내일이면 어제와 같은 업무가 유령처럼 반복되던 그 평범한 일상은, 캐나다로 건너온 후 손에 잡히지 않는 아스라한 타자의 영역으로 밀려나 있었다. 한국에서의 보편적이었던 삶의 궤적이 이곳의 제도 안에서는 '다름'이 아닌 '모자람'이나 '틀림'으로 해독되는 현실. 그 벽 앞에 서는 일은 언제나 서글픈 침전물을 남기는 법이었다.


"선배, 알려주신 에이전트한테 연락이 왔어요. 다음 주 수요일에 면접을 보자고 하네요."

새벽 노동의 고단함 속에 함몰되어 있을 그의 수면을 방해할 순 없었다. 해가 기운 뒤, 그가 생의 허기를 채우고 비로소 깨어날 시간에 맞춰 조심스레 전갈을 띄웠다. 전화기 너머 선배는 가족들과의 식사를 마치고 고국의 소식에 귀를 기울이던 참이었다.


한국은 여소야대의 거친 정국 아래 한나라당의 목소리가 국회의 담장을 높게 가로지르고 있었고, 한일 공동 월드컵을 앞둔 축구계의 분주함만이 타국에 뿌리내린 이민자들의 마음을 잠시나마 고국으로 실어 나르고 있었다. 2001년의 그 뜨거웠던 열기가 태평양을 건너온 전파 속에서 명멸했다.

"축하해. 가게도 동업으로 시작했으니, 잘 준비하고, 면접 끝나면 꼭 소식 전해줘."

그는 마치 자신의 생에 볕이 드는 것처럼 기뻐해 주었다. 수화기를 타고 넘어오는 선배의 목소리는 낮고 따뜻해서, 낯선 땅에서 부유하던 내 마음의 끝자락을 단단히 붙들어 매어 주는 듯했다.


"형님, 새벽에 콜러(Cooler) 상태가 좀 이상한 것 같아요. 가스가 부족한 건지 온도가 자꾸 내려가네요. 냉기가 예전만 못해요."

새벽의 빈자리를 지키던 성철이 교대하러 들어선 내게 밤새 앓았던 기계의 소음을 전했다. 낯선 타국에서의 편의점 일이었지만, 그는 생각보다 빨리 그 일상의 속도에 순응해가고 있었다. 문득 지난 연말 파티의 식탁이 떠올랐다. 동갑내기 베네타를 곁에 두고 주변에서 짓궂은 농담을 던질 때, 두 사람은 수줍게 손사래를 치면서도 서로에게 향하는 시선의 끝을 완전히 거두지는 않았었다.


"그래, 사람 불러서 손봐야겠구나. 수고했다, 어서 퇴근해."

베네타가 출근할 시간임을 성철도 이미 알고 있었을 것이다. 퇴근을 서두르지 않고 가게 주변을 어슬렁거리며 불필요한 정리에 매달리던 그의 뒷모습이 비로소 이해되었다.

"아저씨, 안녕!"

아침의 정적을 깨뜨리는 명랑한 목소리와 함께 베네타가 들어섰다. 가게를 떠나지 못하던 성철을 발견한 그녀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성철, 아직 퇴근 안 했어?"

성철은 대답 대신 느릿하게 손을 들어 올렸다. 여자의 직관보다 남자의 감각은 언제나 한 박자 늦고 무디다지만, 베네타는 성철의 정체된 머뭇거림을 전혀 알아채지 못하는 듯했다. 옆에서 지켜보던 내가 "성철이가 너를 기다리고 있잖아"라고 외치고 싶은 갈증이 목구멍 끝까지 차올랐으나, 끝내 그 말들을 안으로 삼켰다.

사랑은 명사가 아니라 동사라고 사람들은 말한다. 그것은 끊임없이 흔들리고 이동하며 제 자리를 찾아가는 생동하는 기운이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성철과 베네타 사이의 사랑은 아직 어딘가에 고정되어 움직이지 않는, 고요하고 무거운 명사의 상태로 머물러 있었다.


면접 보러 가기 불과 십오 분 전, 에이전트가 건네준 낯선 회사의 이름을 쥐고 나는 그곳에 도착했다. 안내자에게 담당자의 이름을 전할 때, 내 목소리는 부유하는 먼지처럼 허공에서 잠시 머뭇거렸다. 이윽고 나타난 그녀와 나눈 악수는 서늘하고도 형식적이었다. 그 짧은 접촉에서 나는 생의 어떤 온기도 느끼지 못했다. 그녀의 뒤를 따라 사무실로 걸어 들어가는 복도는 끝이 보이지 않는 통로처럼 아득했다.

샌드라와 머리를 맞대고 고쳤던 영문 이력서 위로 그녀의 시선이 느리게 활강했다. 잠시 후, 그녀의 입술 사이로 마른 잎사귀 같은 질문들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것은 한국에서 겪었던 질문들과는 질감이 사뭇 달랐다.

"오 년 후, 당신은 어떤 영향을 회사에 미칠까요?"
"우리가 왜 당신을 채용 해야 합니까?" "직장에서 경험한 문제는 무엇이었으며, 그것을 어떻게 해결했나요?"
"당신은 타인이라는 숲 속에서 함께 걷길 원합니까, 아니면 홀로 적막한 길을 걷길 원합니까?"
"때로 주말 혹은 오버 타임 근무가 가능하나요?"

인사부 직원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질문들은 예상치 못한 순간에 찾아온 소나기처럼 나를 당혹스럽게 했다. 준비되지 않은 대답들이 내 안에서 길을 잃고 헤맸다. 그것은 단지 일자리를 구하는 문답이 아니라, 내가 나 자신으로 살아가기 위해 감내해야 할 생의 지독한 비용을 묻는 것처럼 들렸다.

인사부의 그녀는 임무를 마친 집행관처럼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매니저의 사무실로 인도했다. 문을 열자 육중한 긴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세 명의 사내가 앉아 있었다. 내가 들어서기 전, 그들이 나누었을 담소의 잔향이 공기 중에 부유하고 있었으나, 그 여유로운 온기는 내가 발을 들이는 순간 얼음처럼 차갑게 식어버렸다.

그녀는 나를 매니저에게 인계했다. 그리고는 이제 자신의 소임은 끝났다는 듯 가벼운 작별 인사를 건넸다. 돌아서는 그녀의 등 뒤로 짧은 냉소가 스친 듯했다. 그것은 비정한 전장에서 홀로 남겨진 패잔병에게 건네는 최후의 시선과도 같았다. 이제 이곳에 내 편은 없었다. 사방이 가로막힌 폐쇄된 진지 속에서 나는 오직 고립되어 있었다.


이윽고 침묵을 깬 것은 날카로운 질문의 파편들이었다. 공중에서 투하되는 폭탄처럼, 그들은 내 이력서의 행간을 훑으며 오독(誤讀)의 흔적을 찾아내려 애썼다. 그들의 시선은 종이 위를 느리게 기어 다니는 벌레처럼 집요했고, 질문은 시종일관 칼날처럼 예리했다.

“그것을 어떻게 수행했는지 설명해 주겠습니까?”
“당신이 내린 선택의 근거를 답변해 보시죠.”

쏟아지는 질문의 세례 속에서 나는 내가 살아온 시간들이 난도질당하는 기분을 느꼈다. 그들은 나의 경력이 아니라, 내 삶의 빈틈을 갈구하는 듯 보였다. 한참을 몰아치던 질문의 광풍이 잦아들 무렵, 매니저가 내게 마지막 기회를 던졌다. 궁금한 것이 있느냐는, 형식적이지만 잔인한 물음이었다.

나는 미리 외워둔, 그들의 귀를 감미롭게 자극할 만한 질문 몇 가지를 골라 조심스럽게 내놓았다. 학습된 문장들이 허공을 가르자, 방금 전까지 적의를 품었던 그들의 눈빛에 미세한 균열이 생기며 관심의 빛이 서렸다. 가식적인 호의가 공기 중에 섞여 들었다.

면접이 끝났을 때, 매니저는 비로소 나를 적진에서 퇴각시키는 길잡이처럼 앞장서서 걸었다. 아득한 복도를 지나 건물 밖으로 나가는 길, 그는 내가 안전하게 이 살벌한 영토를 빠져나갈 수 있도록 안내하는 밀사처럼 보였다. 하지만 등 뒤로 닫히는 육중한 문소리를 들으며 나는 깨달았다. 이곳을 빠져나가는 것이 승리인지, 혹은 또 다른 유배의 시작인지 알 수 없다는 사실을.

이전 12화약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