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원 씨, 잘 지내시죠? 저 지금 공항이에요."
전화기 너머로 들려온 것은 몇 달 전 한국으로 떼밀리듯 떠났던 샌드라의 목소리였다. 뜻밖의 음절들이 고인 물 같던 내 일상에 파문을 일으켰다.
"도착했군요. 마중 나갈까요?"
나의 서툰 제안에 그녀는 나중에 다시 연락하겠다는 갈무리만 남긴 채 통화를 끝냈다. 반가움이라는 감정이 채 발화(發火)되기도 전이었다. 수화기를 내려놓고 나서야 나는 비릿한 후회에 젖어들었다. 왜 나는 보고 싶었다고, 당신이 부재하던 시간 동안 나는 줄곧 기다림의 폐허에 서 있었다고 말하지 못했을까. 하지 못한 말들이 가슴속에 침전물처럼 무겁게 내려앉았다. 며칠 뒤, 그녀는 한 다발의 꽃을 품에 안고 환영처럼 가게에 나타났다.
"축하해요, 승원 씨."
진심 어린 축하의 말보다 내 시선을 먼저 낚아챈 것은 꽃을 든 그녀의 손가락에서 차갑게 빛나던 은색 반지였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그 낯선 금속의 광택이 불길한 예감처럼 눈동자를 찔러왔다.
우리는 몇 달 만에 마주 앉았다. 공기는 여전히 낯설었고, 우리는 약속이라도 한 듯 같은 아이리쉬 커피를 주문했다. 김이 모락거리는 잔 너머로 나를 바라보며 웃는 그녀의 모습. 그 미소를 얼마나 긴 시간 동안 마음속으로 소묘(素描) 해 왔던가. 하지만 그녀의 입술이 열리는 순간, 나의 기다림은 일순간에 형해(形骸)로 변했다.
"승원 씨, 저 약혼했어요."
커피잔을 쥐고 있는 그녀의 손가락 위에서 은색 반지는 비로소 제 이름을 찾은 듯했다. 가슴속 깊은 곳에서 소중하게 길러온 소망 한 덩어리가 툭, 하고 끊어져 깊은 수렁으로 떨어져 내리는 충격이 전해졌다. 그러나 나는 그 낙하의 굉음을 숨겨야만 했다.
"축하해요."
내 의지와는 무관하게, 마음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튄 엉뚱한 말이 입 밖으로 비어져 나갔다.
"우리, 이렇게 계속 만나요."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왔으나, 내 귀에는 더 이상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세계가 돌연 적막 속으로 잠겨버린 듯했다. 나는 다만 식어가는 커피잔 속의 검은 수면만을 응시하고 있었다.
“승원 씨, 에이전트한테 연락 왔나?”
성진 선배의 목소리는 눅눅한 잠의 비늘이 채 떨어지지 않은 채 전화기를 타고 넘어왔다. 늘 수면이 부족한 그의 음성에는 어딘지 모를 삶의 습기가 배어 있었다.
“네, 지난주에 통화했어요. 같은 아시아 사람이라 그런지, 제 서툰 영어를 꽤 끈기 있게 견뎌주더라고요.”
말을 내뱉고 나니 문득 흥선대원군이라는 먼 과거의 인물이 떠올랐다. 그의 완강했던 쇄국정책이 원망의 끝에 닿았다. 애국이라는 강박적인 의지로 닫아버린 그 시절의 문들이, 지금 내가 치러야 할 언어의 고초가 되어 되돌아온 것만 같았다. 그 무덤을 파헤쳐버리고 싶다는 발칙한 상상이 찰나의 미열처럼 머릿속을 스쳤다.
“우리가 서로 공생하는 관계니, 그놈인들 별수 있겠어. 참는 게 돈인데.”
선배의 자조 섞인 말에 우리는 짧게 웃었다. 그렇다. 나의 취업은 그(에이전트)에게 달콤한 금전의 혜택을 선사할 터였다.
퇴근 시간이 되자 거리는 빌딩 숲에서 쏟아져 나온 정장 차림의 무리로 범람했다. 공장 주소 하나를 손에 쥐고 전철과 버스를 갈아타며 시내를 부유하던 지난 몇 년 전 날들이 떠올랐다. 한국에서 저들처럼 정장의 깃을 세우고 동료들과 함께 점심시간의 거리를 활보하던 기억이 아련한 환지통처럼 밀려왔다.
가계에서 집으로 돌아와 몇 년 동안 옷장 깊숙이 유배되었던 정장을 꺼냈다. 구겨진 기억을 펴듯 조심스레 다림질을 하고, 와이셔츠에 어울릴 넥타이를 하나하나 대보며 거울 속의 낯선 나를 응시했다. 나는 약속 시간보다 한참 일찍 에이전트의 사무실 앞에 도착해 있었다. 그곳엔 새로운 생의 허기가 기다리고 있었다.
사무실 문을 밀고 들어서자 안내석의 젊은 여자가 사무적인 눈길로 방문 목적을 물어왔다. 그녀는 하루에도 수십 번씩, 나와 같은 처지의 사내들을 향해 앵무새처럼 같은 질문을 반복해 왔을 것이다. 그녀가 가리킨 구석진 소파에 몸을 묻고 잠시 앉아 있자니, 저편에서 담당자인 마이크가 나타났다.
"헬로, 마이 프렌드(hello, my friend!)" 그가 친근하게 내민 손을 나는 얼떨결에 맞잡았다.
필리핀 태생인 마이크의 목소리에는 그곳 특유의 거칠고 딱딱한 억양이 묻어 있었다. 그 역시 나의 짧은 대답 속에서 낯선 한국인의 억양을 읽어냈을 것이다. 우리는 책상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았다. 그는 내가 감당해야 할 업무를 설명하고는 몇 가지 질문을 던졌다. 그것은 그저 내 경험의 궤적을 확인하려는, 건조하고도 단순한 물음들이었다.
희준 씨가 새로운 상품 보따리를 들고 가게를 찾아왔다. 아이들의 시선을 붙들 알록달록한 장난감부터 묵직한 담배 파이프와 라이터까지, 그가 부려놓은 물건들은 저마다의 생경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다른 가게들은 좀 어떻습니까?" 나는 그에게 물었다. 여러 지역의 편의점을 떠도는 그와의 대화는, 닫힌 문 너머의 세상을 엿볼 수 있는 유일한 통로였다.
"사장님도 아시다시피, 다들 죽겠다고만 하네요." 희준 씨의 대답은 예상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았다. 경기가 좋아 장사할 맛이 난다는 말은 이제 전설 속의 노래처럼 아득했다. 사람들은 그것을 흔히 '과거의 영광'이라 불렀다. 이민 선배들의 이야기는 언제나 빛나던 시절에 대한 지독한 그리움과, 결코 되돌릴 수 없는 현재에 대한 푸념 사이를 공허하게 맴돌 뿐이었다.
그 무렵 나는 수업이라는 명목의 가느다란 끈을 붙잡고 샌드라와의 만남을 위태롭게 지탱하고 있었다. 그러나 내면의 한구석에서는 그녀가 한국에 유기하고 온 약혼자의 환영이 습기 찬 그림자처럼 번져와, 어느덧 수습할 수 없는 불편한 기표들로 자리 잡고 있었다.
그날도 우리는 활자들 사이를 부유하며 그녀가 준비해 온 영어 교재를 나누었다. 문장들은 입술 끝에서 맴돌다 흩어질 뿐, 정작 마음의 허기는 채워지지 않았다. 수업을 마친 뒤 우리는 영 앤 던다스(Yonge & Dundas) 인근의 한 중국 식당으로 자리를 옮겼다. 붉은 식탁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은 초조한 시간 속에서, 나는 마침내 가슴속에 고여 있던, 비수처럼 차가운 말을 힘겹게 건져 올렸다.
“우리, 이제 그만 만나는 게 좋겠어요.”
그녀는 마치 보이지 않는 둔기에 타격당한 듯, 일순간 사고가 정지된 눈빛으로 나를 응시했다. 침묵이 공기 중의 밀도를 희박하게 만들 무렵, 우리가 주문한 음식들이 마치 뒤늦게 도착한 비보처럼 불편한 식탁 위로 놓였다. 그녀의 눈동자에 투명한 슬픔이 고였고,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갈라진 틈 사이로 흘러나왔다.
“……왜요?”
“한국에 있는 약혼자에게 미안해서요.”
내 진심의 궤적과는 무관한, 생경한 문장 하나가 타인처럼 내 입술을 타고 도망쳐 나갔다. 김을 모락모락 피워 올리던 음식들은 대화가 끊긴 식탁 위에서 속절없이 식어가고 있었고, 우리 사이의 시간도 그렇게 돌이킬 수 없는 온도로 굳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