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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라크네 Feb 20. 2024

내 안에는 두 소녀가 살고 있다

-루이자 메이 올콧,  <작은 아씨들>

<작은 아씨들>은 성장소설로 분류되지만 나는 어른이 되고서도 자주 이 소설에 대해서 생각한다.


소설을 처음 읽은 것은 12살에서 13살로 넘어가는 겨울이었다. 유난히 눈이 많이 내리던 해였고 그 덕에 겨울방학이 꽤 즐거웠다. 밖에서 동네 친구들의 떠드는 소리만 들리면 옷을 껴입고 달려 나가 눈으로 할 수 있는 모든 장난을 저질렀다. 저녁이 되면 뜨겁고 욱신거리는 몸을 끌고 들어와 밥을 먹은 뒤 바로 꼬꾸라져 꿈도 없는 단잠을 잤다. 세상의 모든 아이들이 누려야 마땅한 방학이었다.


뽀득뽀득 눈을 밟으며 도서관에 가기도 했다. 나무냄새가 나는 서가 앞을 어슬렁거리며 책을 구경했다. 뽑아 든 건 대체로 소설이었다. 잭 런던의 <야성의 부름>, 프랜시스 호지슨 버넷의 <비밀의 화원>, <소공자>, 루시 모드 몽고메리의 <에이번리의 앤>, <레드먼드의 앤> 등. 이 ‘문학소녀 만들기’ 과목의 커리큘럼 같은 독서목록 중 <작은 아씨들>이 있었다.


내 생애 첫 <작은 아씨들>은 선분홍색 양장서적으로, 일러스트가 고전적이면서도 아름다웠다. 몇 장 뒤적이던 나는 곧장 대출해서 집으로 들고 왔다. 그리고 저녁마다 엎드려 하루 100페이지쯤 읽어 치웠다. 나흘 만에 다 읽어버린 나는 한 번 더 읽었고, 대출 직전에 다시 한번 읽었다. 그리고 용돈을 모아 기어코 책을 샀다.


어린 나를 홀린 건 단연 캐릭터였다. 네 자매들은 모두 개성이 강했는데, 단연 튀는 소녀는 둘째 ‘조세핀 마치’였다. ‘조’라고 불리길 좋아하는 이 친구는 털털하고 적극적이고 모험적이었다. 유머감각이 뛰어나며 장난기가 많은데, 그러면서도 다정하고 따뜻한 면까지 갖추고 있어서 정말이지 싫어하려야 싫어할 수가 없었다.


특히 좋았던 건 ‘조’가 책을 좋아하는 작가지망생이었다는 사실이다. 늘 자신만의 다락방에서 사과를 먹으며 소설을 읽던 조. 작업용 모자를 쓰고 창작의 소용돌이에 빠져 글을 휘갈기던 그 신비로운 예술가의 아우라. 내가 지금 소설로 밥벌이를 하며 사는 건 그 시절 ‘조’를 동경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다음으로 좋아하는 캐릭터는 ‘엘리자베스 마치’였다. 가족들 사이에서 ‘베스’로 불리는 이 소녀는, 언니인 ‘조’와 까마득하게 다른 성품을 지니고 있다. 마음씨가 천사처럼 곱고 동정심이 풍부하며 조용하고 겁이 많았다. 취미는 피아노 연주와 망가진 인형들을 위한 병동 운영(그러니까, 인형수선)이었다.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있다. 우연한 계기로 마치 가문의 식구들은 이웃에 사는 부자 할버지 로렌스 씨와 친구가 된다. 품위 있지만 가난한 마치가의 식구들은 염치가 허락하는 한도 내에서 로렌스 가문의 문턱을 드나든다. 그러나 자매들 중 베스만이 그의 집을 방문하지 않는다. 로렌스 씨의 얼굴이 워낙 험상궂은 데다가 처음 만났을 때 지나치게 호탕하게 인사를 걸어 베스가 놀라 도망을 쳐버린 것이다.


겁이 많은 베스는 감히 그와 친분을 맺을 생각을 못하는데, 주변 가족들은 베스를 부추긴다. 그의 집에 아주 좋은 그랜드 피아노가 있다고 말이다. 늘 마치 가의 낡은 피아노 때문에 속이 상해 눈물을 흘리던 베스는 용기를 내어 로렌스 씨에게 부탁한다. 집에 방문해 피아노를 쳐도 되느냐고. 베스에게서 오래전 잃은 손녀를 떠올리던 그는 흔쾌히 베스를 초대한다.


할아버지의 인심덕에 좋은 피아노로 마음껏 연습을 한 베스는 그에게 감사의 마음을 담은 선물을 하기로 결심한다. 슬리퍼에 열심히 제비꽃을 수놓아 보낸 베스. 한동안 아무 응답이 없어 혹여 마음에 들지 않은 건가 시무룩해있던 베스에게 꿈에도 상상 못한 선물이 찾아온다. 로렌스 가의 멋진 그랜드 피아노가 마치 가로 배달된 것이다. 슬리퍼에 대한 멋진 답례선물이었다. 베스는 그대로 로렌스 가로 달려가 할아버지에게 감사의 입맞춤을 하고, 두 사람은 나이를 초월한 친구가 된다.


읽은 지 이십 년 가까이 된 에피소드지만 떠올리기만 해도 눈물이 난다.


조와 베스는 완전히 다른 소녀이지만 자매들 가운데 가장 사이가 좋다. 조는 소심하고 몸이 약한 베스를 돌봐주고 베스는 강하고 씩씩한 언니에게 기댄다. 두 사람은 서로에게 소중한 소울메이트였다. 그래서 나는  <작은 아씨들>의 후속작인 <좋은 아내들>에서 베스가 죽는다는 사실을 알고 후속작 읽기를 포기했다. 조의(그리고 마치가 식구들의) 상실감을 짐작할 수 있었으니까. 또, 조가 작가가 되길 포기한다는 걸 알게 되고 더더욱 관심이 사라지고 말았다.


그렇게 나는 소녀시절에서 멈추어버린 조와 베스를 품은 채 20대가 되었다. 점점 책장에서 <작은 아씨들>을 뽑아 드는 일은 적어졌지만 조와 베스는 내 일부였다. 유년기의 추억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나 자신이었다. 그들이 나를 통해 세상에 되살아났다.


미친 소리 같겠지만 참고 조금만 더 들어주시길.


어린 시절, 나의 성격에 대해서는 늘 의문투성이였다. 예민해서 잘 놀라고, 감수성 탓에 눈물이 많고, 불안성향 때문에 겁도 많았다. 잘못 먹은 것도 없는데 자주 배가 아팠고, 학교에 있는 시간 내내 조마조마해 늘 책에 코를 박고 소설 속 세상으로 도피하곤 했다.


하지만 다른 한편에는 반항적이고, 솔직하고, 단호한 내가 있었다. 누군가 나에게 도를 넘는 장난을 치면 고자질쟁이 소리를 듣더라도 어른들에게 알려 그만두게 만들었다. 하고 싶은 일이 있으면 누가 뭐래든 그냥 했다. 학급의 대부분의 아이들이 나를 경원시했지만 사실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직접적인 공격에 대해서는 예민했지만 남이 날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었다.


학창 시절을 돌이켜보면 내 성품이 답이 없는 수수께끼처럼 느껴지곤 한다. 여러 악조건과 불운으로 인해 나는 학교에서 온갖 나쁜 드라마를 겪었다. 외부의 공격은 마음에 상처를 주었고 그 상처는 평생 갈 흉터가 되었다. 하지만 한편, 보다 깊은 곳에 있는 나는 울고 있는 나를 팔짱을 끼고 바라보곤 했다. ‘뭘 울고 그래. 별 일도 아니구만’하면서.


한쪽에서는 울고, 한쪽에서는 관조한다. 평생 잊을 수 없는 굴욕의 순간에도 내 마음은 절반으로 갈라져 다른 인격으로 당면한 상황을 겪고 있었다.


십 수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상처는 여전히 상처다. 나쁜 상황에 처한 청소년이 등장하는 콘텐츠를 보면 경미한 공황이 온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과거에 대해 상당히 관조적이다. 마치 남의 불행처럼.


‘어린 시절의 상처가 평생을 좌우한다는 이론은 프로이트가 만들어낸 가장 유해하고 터무니없는 발명품이지. 찌질하게 자기 연민에 빠져 있지 말고 원고나 하는 게 어때?’


마음은 여전히 슬픔에 차있는데 다른 마음은 금속성의 목소리로 지껄인다. 나는 상처 입는다. 내가, 나 자신에게 상처 입는다.


내 안의 상반된 목소리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다. 논리와 감정인가? 하지만 사람은 모두 (비율과 농도에 차이는 있겠지만) 논리와 감정을 가지고 있고, 그럼에도 나처럼 혼란을 느끼는 사람은 없어 보인다. 그럼 정신분열증? 그런 병에 걸린 것 치고는 꽤 멀쩡하게 생활하고 있는 것 같은데. 생각할수록 오리무중이었다.


그렇게 정반대로 갈라진 나는 비틀거리며 20대를 보냈다. 꿈을 추구하기에는 불안도가 높아 이상을 좇기 힘들었고, 불안에서 벗어나고자 안정적인 직장을 잡아볼까 싶을 때면 내 안의 반항적인 기질이 분통을 터트려서 시도도 못했다.


결국 내가 할 일은 글쓰기라고 결론 내렸다. 그래서 매일같이 글을 썼다. 깜깜한 미래 탓에 우울증이 오고, 신경통이 온 몸을 휘젓는 상황에서도 노트북을 메고 카페로 가서 A4 5장은 꼭 채우고 돌아왔다.


일이 끝나면 집 근처 하천길을 걸었다. 나 자신에 대해서 생각하면서. 늘 30m 상공에 뜬 20 × 20짜리 판자에 발을 붙이고 서있는 것만 같은 위태로운 감정은 어디에서 기인하는 것인지. 대체 왜 불안하고 괴로우면서도 안정적인 길은 생각만 해도 메스꺼운지. 지킬 박사처럼 이상야릇한 과학실험을 한 것도 아닌데 왜 나는 상반된 기질을 끌어안고 허덕여야 하는지.


그러다가 문득 <작은 아씨들>의 조와 베스가 생각났다. 내 마음만큼이나 상반된 기질의 두 소녀.


나의 예민하고 유약한 성질은 베스의 것과 같았다. 지루한 걸 싫어하는 반항적인 기질은 조의 것과 같았다. 내 안에는 사이좋은 두 자매가 함께 있었다.


비유는 비유일 뿐이고, 새로운 발견이 곧장 문제해결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하지만 감당하기 힘든 기질에 친근한 캐릭터의 이름을 붙이는 건 자신을 받아들이는 데에 약간의 도움을 준다. 나는 새로운 착상을 음미해 보았고, 이 지긋지긋한 대립적 기질에 이름표를 붙이기로 결심했다.


‘베스’와 ‘조’.


<델마와 루이스>가 떠올라 마음에 들었다. 그때부터 나는 불안하고 겁에 질릴 때면 ‘베스야, 왔구나’하고 상냥하게 인사를 하고, 무모하고도 근사한 꿈에 사로잡힐 때면 ‘조야, 왔냐?’하고 무심히 아는 척했다.


그렇게 마치 가의 두 소녀의 도움을 받아 복잡한 자아를 수용하는 동안 30대가 되었다. 어느새 나는 조가 포기했던 꿈인 ‘소설로 먹고사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통장에 잔고가 넉넉해지니 불안이 감소했다. 몸에 돌아다니던 통증도 희미해졌다. 나는 우울증 환자에서 일중독 환자로 변신했다. 글로 밥벌이를 할 수 있다면 과로사로 죽는 것도 나쁘지 않았기에 일중독 증상을 수용하기로 했다.


내 안의 상반된 기질도 서로 화해했다. 시도 때도 없이 울어대던 물렁복숭아 같던 베스도 적당히 감성적인 딱딱복숭아가 되었고, 셜록 홈즈처럼 재수 없던 조도 따스하고 포용적인 언니가 되었다. 두 사람은 원작에 가까운 자매사이가 되어 사이좋게 지낸다.


돈이 마음에 끼치는 긍정적인 영향을 설파하며 글을 마무리지어야 할까? 그건 싫다. 이 글은 배금주의를 부추기기 위해 쓰인 게 아니고, 진실도 아니니까. 내가 만일 주식이나 갭투자(감히 이런 의존명사를 붙여도 될지 모르겠지만)따위로 돈을 벌었다면 지금의 만족은 없었을 것이다. 나는 어린 시절 다락에서 소설을 쓰던 ‘조’를 통해 꿈을 발견했다. 그 꿈을 이루기 위해 20대를 바쳤고, 어린 시절의 꿈이 이제는 오늘, 그리고 내일의 생활이다.


일을 하는 동안에는 등 뒤에 길게 이어진 눈물의 웅덩이들이 천천히 말라가는 기분이 든다. 평생 할 일을 찾은 것 같아 마음이 든든하다.


내 일과 삶을 좋아하는 것. 이것이 평온의 열쇠이다. 적어도 나의 ‘조’와 ‘베스’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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