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아라크네 Feb 20. 2024

우울한 날의 긴 산책

나는 평소 오만가지 이유로 우울해지는 인간이기에 우울한 상태가 딱히 특별하지 않다. 글이 안 써져서 우울하고, 악플이 달려서 우울하고, 환절기라 우울하고, 수입이 들쑥날쑥해 우울하고, 엄마의 건강이 나날이 나빠져서 우울하고, 스스로가 찌질해서 우울하고, 사람을 너무 안 만나서 우울하고, 사람을 지나치게 많이 만나서 우울하고, 과로해서 우울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아서 우울하고.....바람에 스치기만 해도 우울해지는 인간이 바로 나다.


이번에 우울해진 이유는 잠을 자지 못해서이다. 저녁에 선물로 들어온 녹차 롤케이크를 한 조각 먹었는데 그게 화근이었다. 초록색 색소를 입고 풀냄새만 조금 풍기는 기존 녹차 제과류를 예상했는데 이건 아이덴티티를 분명히 하기 위해서인지 녹차성분이 진한 농도로 첨가되어 있었다. 맛있게 먹고 흐뭇하게 배를 문지르고 있는데 점점 심장박동이 빨라지고 감정이 고양되기 시작했다. 엿된 것이다.


나는 30대에 접어들며 카페인 민감성 체질로 변했다. 커피는 물론, 콜라, 초콜릿과 같은 카페인 성품이 미량인 식품에도 각성효과가 나타난다. 그래서 오후 5시 이후에는 카페인 식품을 일절 먹지 않는다. 밤을 꼬박 새우게 되기 때문이다.


지나치게 고퀄리티인 롤케이크 덕분에 나는 아침 8시가 되어서야 겨우 잠에 들었고 3시간 남짓 자다가 깨어났다. 머리가 멍하고 속도 쓰렸다. 그리고 기분이 아주 나빴다.


나는 20대를 롤러코스터 같은 감정기복 속에서 보내며 몸과 마음의 연관성을 분명하게 인식하게 되었다. 영양소가 부족하거나, 일조량이 적거나, 체력에 비해 터무니없이 활동했거나 기타 등등 컨디션을 망치는 상황이 오면 대번에 기분부터 나빠진다. 만사에 성질이 나고 비관적이 된다.


몸과 마음은 연결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서로에게 기대어 있다. 사람인人이라는 한자를 세간에서는 ‘사람’과 ‘사람’이 서로에게 기대어 있는 모양으로 빗대곤 하는데, 내가 보기에는 ‘몸’과 ‘마음’이 서로에게 기대어 있는 모양이다. 둘 중 하나가 쓰러지면 나머지도 같이 무너진다. 인간이란 그런 존재다.


컨디션 난조로 기분이 나빠지면 생각을 통한 마인드 컨트롤이 불가능하다. 평소 수조 안에 깔려있는 침전물 같던 기억들이 의식 위로 둥둥 떠오른다. 검은 기름처럼, 벌레의 시체처럼, 폐그물에 엉켜 썩어가는 뿌연 눈동자의 물고기들처럼.


행복은 아무리 붙잡으려 해도 그 향과 맛은 금세 변질되고 만다. 그에 비하면 불행은 얼마나 보존성이 높은가. 나는 20년 전의 불행했던 사건을 일주일 전에 겪은 일처럼 떠올릴 수 있다. 디테일은 뭉개졌어도 충격은 싱싱하다.


기억은 감정을 몰고 온다. ‘불쾌한 기억 씨’에게는 여러 단짝들이 있는데 자책감과 수치심, 분노, 비참함이다. ‘불쾌한 기억 씨’는 나보다 사회관계가 좋은 듯하다. 본받을 만한 점이다.


위에서 말했다시피, 몸은 마음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이런 상태에서는 몸 상태도 좋지가 않다. 명치 부근에 압박감이 느껴지고 통증이 몸을 옮겨 다니며 일어난다.


몸이 안 좋아져서 기분이 나빠지고, 그 나빠진 기분 때문에 다시 몸이 아파지는 것이다. 악순환의 고리는 어쩜 이렇게 쉽게 만들어질까?


하여튼, 그렇게 다시 우울한 상태가 되었다. 잠을 거의 못 자다시피 해 졸도할 지경인데도 더 이상 잘 수가 없었다. 멍하니 누워 블라인드 사이로 들어오는 햇빛을 보고 있자니 사는 것이 까다로운 퀘스트처럼 느껴졌다. 세상 사람들은 잘만 깨는데 나만 못 깨는, 나한테만 어려운 퀘스트.


구시렁구시렁 신세한탄을 하며 침대에서 일어나 인덕션에 물을 올린다. 냉동실에서 소분해 놓은 호주산 다짐육 한 큐브를, 냉장실에서 양파 하나, 스파게티 소스병을 꺼낸다. 머릿속은 ‘이승에 한이 있어서 매일 밤 찾아오는 여귀가 뿜어내놓은 입김’이 들어찬 듯 뿌얘서 면 대신 끓는 물에 다이빙을 하고 싶은 심정이지만 꾹 참고 파스타 한 그릇을 만들어낸다.


컴퓨터 앞에 앉아 사랑과 전쟁 10분 편집본을 보며 꾸역꾸역 먹는다. 설거지는 나중으로 미루고 양치를 한 뒤 원고를 시작한다. 기분이 더러우니 원고도 더럽게 느껴지지만 꾸역꾸역 하루 분량의 작업을 마친다. 어느새 밖은 해가 기울고 있다.


오늘의 첫 세수를 한다. 뒤이어 첫 스킨케어와 첫 빗질이 이어진다. 옷을 주섬주섬 걸쳐 입고 운동화 중 가장 가벼운 걸 신은 뒤 밖으로 향한다.


천천히 다리를 움직인다. 왼발, 오른발, 왼발, 오른발. 걷기의 장점은 이토록 단순하다는 데에 있다. 첫걸음마를 떼던 시절 배웠던 기술을 연마발전 없이 평생 써먹을 수 있다. 왼발, 오른발, 왼발, 오른발. 먼지를 머금은 공기가 코 속으로 빨려 들어온다. 찌무룩한 기분을 머금은 집안 공기보다는 낫기에 열심히 들이마신다.


걷는 동안 천천히 사위가 어두워져 간다. 내가 사는 동네는 후미지고 낙후되어 미관 따위 존재하지 않다. 구경거리도 없다. 저녁만 되면 갈지之자로 걸어 다니는 불콰하게 취한 중년 아저씨들 빼고는.


올리브영을 지나고, 이디야를 지나고, 농협을 지나고, 보쌈집을 지난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기분이 나아진다. 쉬지 않고 움직이는 다리에서부터 에너지가 솟아오른다.


목적지는 공원이다. 이십 여 개의 계단을 올라가면 원형 잔디밭을 도넛처럼 둥그렇게 에워싼 산책로가 있다. 천천히 걷기 시작한다. 철조망 너머로 붐비는 퇴근길 6차선 도로가 내려다보인다. 차 안에 있는 사람들은 죽을 맛이겠지만 멀리서 보면 그 불빛들이 참 아름답다.


미관 따위 없는 동네라고는 했으나, 공원에 오면 이따금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다. 밤과 저녁의 경계에서 아주 짧게 존재하다 사라지는 청람색 하늘이라던지, 잔디 속에서 서로 엉켜 뒹구는 금빛 털의 새끼 고양이들이라던지(인기척을 느끼면 바로 도망간다. 어미가 교육을 잘 시킨 듯하다.), 보호자와 함께 산보를 나온 아장아장 걷는 꼬맹이들이라던지.


한참을 걷다가 벤치에 앉는다. 인공조명 탓에 어둠의 위엄을 빼앗긴 먼지색 밤하늘과 웃는 눈처럼 얇게 구부러진 초승달을 바라보다가 집으로 돌아간다.


씻고 옷을 갈아입은 뒤, 냉동실에서 (문제의 녹차 롤케이크가 포함된) 선물세트 상자를 꺼낸다. 카페인과 가장 연관이 없어 보이는 후르츠 파운드케이크 한 조각을 해동시켜 먹고 책을 몇 장 뒤적이다가 침대에 눕는다. 불을 끄고 누워도 우울감은 느껴지지 않는다. 나는 조용히, 순탄하게 잠이 든다.


우울에 취약한 나에게 삶은 난감한 퀘스트의 연속이다. 내 마음은 영화 <인사이드 아웃>의 ‘슬픔이’가 관제탑을 지휘하고 있는 것 같다. 이럴 때를 대비해서 내가 어떨 때 우울한지 데이터를 쌓으려 노력하지만, 몸을 이해하는 것보다 곱절로 어려운 일이 마음을 이해하는 일이라 대비책에는 구멍이 숭숭 뚫려있다.


하지만 우울을 피하지는 못하더라도 빠져나오는 방법은 알고 있다. 먹고, 일하고, 걷고, 아름다움을 느끼고, 일찍 잠드는 것.


그러니까, 삶을 살아가는 것.


우울에 대처하는 방법은 오직 하나, 살아가는 것뿐이다.


작가의 이전글 나는 제인 오스틴의 소설과 결혼하고 싶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