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정원
서먹한 구름이 몰려와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비가 내리기 시작한 시간은 오후 19시 30분. 오후의 늦은 시간에 속한다. 작은 마을에 틀어박혀 창문을 바라본다. 비가 서글프게 내리는 걸 보고 있는 나. 겉이 얇고 긴 바늘처럼 내리는 비는 내 가슴에 비수를 꽂는다. 비 오는 소리를 들으며, 시간은 점차 흘러가고 있다.
그러나, 자욱한 안갯속에 희미한 그림자가 보인다. 비가 세차게 와 정확하게 보이지 않았지만, 짐승의 형체는 아니다. 이런 망할 날씨에, 누군가가 계속 서있었다. 마을 사람인지 확인하기 위해, 급하게 우산을 펼치고 나갔다. 세찬 비를 견디며, 마을의 오래된 정원으로 가보니. 한 어린아이가 비를 맞으며, 가만히 서있었다.
그녀는 노란 장미꽃을 보고 있었다. 그 꽃은 오랜 세월 동안 왕성하게 무럭무럭 자라 무성해졌지만, 그녀는 시간이 정체된 듯, 주변의 분위기가 고요했다. 세찬 비가 와 시야가 가려 질정도로 하얀 연기가 그녀의 주변을 감싸고 있었다.
"얘야. 우산도 쓰지 않고, 비 맞고 있으면 건강에 안 좋단다. 집에 들어가는 게 좋지 않겠니?" 나조차도 쓰기에 벅찬 작은 우산을 씌어주며, 말했다. 하지만 그녀는 미동도 하지 않는다. 가만히 노란 장미꽃을 주시하고 있다. 아무리 말을 걸어보지만, 노란 장미꽃에 홀린 듯, 그녀의 영혼을 맡긴 것 같았다.
"알롱드레.. 알롱드레가 외치고 있어요.." 그녀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생전 처음 듣는 이름으로 거친 비를 맞으면서 무슨 말을 중얼중얼거리는지. 도무지 이해가 안 됐다. "알롱드레..? 그게 누구니? 계속 비를 맞고 있으면 병에 걸린단다. 그 병은 너를 괴롭힐 거야." 답답한 마음으로 그녀에게 소리쳤다.
"알롱 드레... 알롱 드레.. 육체적으로 아파도 상관없어요. 아니, 병에 걸려 이 세상을 떠나면 그를 볼 수 있을까요..? 볼 수만 있다면.." 그녀의 말을 듣고, 혀를 내둘렀다. 무슨 어이없는 일인가.. 세찬 비를 맞으면서 한없이 꽃을 보고 있고, 계속 엉뚱한 소리를 해대고 있다.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고, 그녀에게 다시 물어봤다. " 그래. 알롱 드레란 사람은 멋진 사람이었지. 혹시 그에 대해서 알려줄 수 있니?"
"알롱 드레.. 그는 내 세상이자, 모든 것이에요. 말로는 소개하기 힘들 정도로 멋지고 완벽한 사람이었죠."
알롱 드레란 그녀의 첫사랑이자, 모든 것이었다. 그의 따뜻한 미소와 손길은 노란 장미꽃 향기처럼 그녀의 마음을 훔쳤다. 그의 매혹적인 분위기에 매료되며, 그에 대한 마음이 감화된 것이었다.
그와 그녀는 이 정원에서 수없이 만났고, 하루하루가 마법의 날처럼 시간이 멈춘 듯 그들만의 추억을 쌓아갔다. 알롱 드레는 그녀에게 말한다. " 사람들은 시간이 모든 것을 잊게 만든다고 하지만, 난 그 반대라고 생각해. 오히려 강렬한 순간일수록 잊혀지는 것이 아닌, 더 선명해질 거야. 우리의 아름다움은 지속될 거라고 믿어."
그의 말이 맞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감정의 고통은 점점 커져갔다. 그 강렬한 순간이 그녀의 마음을 휘감았다. "당신 말이 맞아요 알롱 드레.. 사람들은 시간이 흐를수록 모든 것이 잊혀진다고 하지만, 나는 그렇지 않아요. 오히려 시간이 흐를수록 당신의 모습이 선명해져요. 당신과 나눈 아름다운 추억. 슬프게도 그 추억은 인생에 단 한 번 뿐이겠죠." 그녀의 눈가에 눈물이 맺히기 시작했다.
몇 년 전 이 작은 마을에 전쟁이 일어났다. 나라의 세력 다툼으로 그 마을을 차지하기 위해, 전쟁을 벌인 것이었다. 이곳은 자연의 에너지가 넘쳐나 자원이 풍부한 곳이었다. 뚜렷한 계절 변화로 곡식은 물론이고, 아름다운 생명체들이 모여있는 고귀한 장소였다. 그러나, 전쟁으로 인해 대부분이 파괴되어, 그 아름다움은 정녕 볼 수 없게 되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사라졌으며, 그 수만큼 무덤이 가득 차있었다. 다른 마을의 사람들은 그 마을을 저주받은 마을이라 칭하며, 그 근처에 얼씬조차 안 했다. 단 하루 만에 아름다운 토지가 저주의 늪으로 바뀐 것이다. 맑고 깨끗한 계곡물도 전쟁으로 인해 오염되어, 갈색으로 변색되었다. 거뭇거뭇한 냄새와 쓰레기 천지. 지저분하며, 전쟁의 흔적들이 곳곳에 퍼져있었다. 그런 곳에서 소수의 사람들이 남은 것이었다.
그러나, 알롱 드레는 병사를 통솔하는 용감한 단장이었으며, 아름답게 전사하였다. 그의 이름은 서서히 잊혀져 가지만, 그녀의 마음속에는 영원한 사랑이자, 멋진 존재. 생전 그의 단 한마디 때문에 살아가고 있는 이유이다. " 세리카. 나는 죽어도, 너의 마음속에서 영원히 떠나지 않을 거야. 나는 너의 곁에 있을 테니 걱정하지 마. 어떤 위협이 와도 내가 끝까지 지켜줄게. 언제나 사랑해. 세리카"
사람들이 그녀에게 어떠한 마음으로 접근해도, 그녀는 자리를 굳건히 지켜내고 있었다. 정원 속 노란 장미꽃 앞에서. 그를 설명하기에는 단지 몇 마디로 부족하다. 마치 바람을 손으로 잡으려는 것처럼. 그는 보이지 않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그의 의지는 그 정원 속 모든 곳에 퍼져있다. 그의 이야기를 풀어내려면, 오래된 나무의 곧게 뻗은 뿌리와 원형 속 원형 고리의 패턴으로 시간을 정확하게 짐작할 수 없는 나이테처럼. 그와 같이 있던 시간과 기억의 조각들을 꺼내려면 많은 시간이 걸린다. 그는 현재 길게 늘어진 길 위에 발자국을 남길 수 없지만, 그의 흔적들은 여전히 작은 마을 곳곳에 남아 있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