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아이가 태어나고 처음 받은 엄마라는 역할에 적응하지 못한 채 헤매고 있던 참이었다.
연극에 빠져있던 지인이 대학로에 연극을 보러 가자고 했다.
구세주를 만난 것처럼 남편에게 아이를 맡기고 설렘으로 향했다.
그렇게 내가 제일 처음 본 연극은 <짬뽕>이었다.
발음 속 날숨이 아름다운 혜화역에 내린 순간,
에너지의 숨을 느끼며 엄마를 벗고 '나'를 입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소극장이란 곳으로 들어갔다.
배우의 숨소리도 들릴듯한 가까운 거리,
옆사람의 꼬르륵 뱃고동 소리도 들리는 밀착된 객석,
암전 속 빛줄기에 흩날리는 희뿌연 먼지,
오래된 소품과 오래된 열정이 뒤섞여 나는 쿰쿰한 꿈의 냄새.
그날 나를 압도한 건 무대 위 공간이 주는 감각이었다.
배우들의 목소리는 동굴 속에서 만들어내는 진한 울림 같았다.
작은 대사도 공간을 울리며 내 마음속으로 들어왔다.
눈빛의 변화, 미세한 움직임에도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저런 무대에 올라가서 연기를 하면 어떤 기분일까?
저 많은 대사를 외워서 진짜 에너지를 전달하려면 얼마동안 연습해야 할까?
배우들의 생동감에 압도된 나는 연극이 끝나고 나서도 한참 동안 여운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5월의 밝은 빛이 원망스럽게 느껴지는 건 처음이었다.
다시 암전속으로, 울림 속으로 들어가고 싶었다.
교사 영어 연구회에서 영어 연극 수업을 배울 때였다.
하나의 대본을 가지고 여러 가지 말투와 목소리로 표현하며 연습했다.
나는 무슨 용기에서였는지 손을 들고 동그랗게 앉은 선생님들 안으로 들어가서 목청껏 대사를 뱉어냈다.
짧은 대사가 끝나고 자리로 돌아가 앉을 때 왠지 모를 카타르시스를 느꼈다.
그날 나는
무대 위에서 소리를 내는 일은
세상에 소리를 내는 일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엄마가 되고 엄마의 목소리로
세상에 처음 <엄마의 유산>이라는 소리를 냈다.
작년 7월 공저로 참여했던 <엄마의 유산> 시리즈가
11월, 다른 작가님들에 의해 새로운 <엄마의 유산>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위대한 시간'이 <편지극>으로
대학로 소극장에서 초연된다.
'초연' 이 단어가 주는 느낌이 좋다.
제일 처음, 제일 먼저, 제일 앞서
시작됨을 뜻해서가 아니라
연결과 지속을 품고 있어서 귀하다.
나는 이번 공저에 참여하지 않아 무대에 서지 않지만
편지를 먼저 쓴 사람으로서
작가님들의 연습과정 옆에 서있다.
무대 위에서
엄마의 편지를 전한다는 건
다른 사람의 말을 전하는 것이 아니었다.
몇 달간 써 내려간 엄마의 진심을,
꼭 전해주고 싶은 정신을,
엄마의 목소리와 숨소리로
빛과 함께 전하는 것이었다.
오래된 소품과 오래된 열정으로 뒤섞였던
쿰쿰한 꿈의 냄새는
엄마들의 선한 꿈과
아이들의 신선한 꿈이 포개져
진한 꿈의 냄새로 진화했다.
무대 위 엄마의 마음 깊은 곳에서
무대 밖 아이의 심장 깊은 곳까지
울림과 공명이 되어 전해진다
오늘 아침 어느 작가님의 낭독을 들었다.
"아이야, "
첫마디부터 기분이 이상했다.
세 줄을 듣고 눈물이 왈칵 터져버렸다.
눈물을 들킬까 봐 눈을 껌뻑이며 고개를 숙였다.
엄마라서
딸이라서
'나'라서
어쩔 수 없이 눈물이 났다.
영상 by 지선 작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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