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간 후, 해와 달이 스무 번 바뀌는 동안에도
부모님께 책 배달을 망설이고 있었다.
내가 초대한 세계에 빛이 부족할까 봐.
아버지의 불면으로 점화된 내 이야기가
아버지의 하늘을 흐리게 만들까 봐 제자리에 멈추어 있었다.
주저의 시간을 걸으며 문득 깨달았다.
나는 과거 기억 속 불면의 밤에 따뜻한 정체성을 입혔고,
정체성을 입은 밤으로부터 파생된 성장의 조각을
하나씩 삼켰노라고.
그 숙명적인 목 넘김을 아버지도 애틋하게
바라봐줄 거라고.
아버지께 '내가 채색한 삶의 순간'이
책으로 나왔다고 말하는 순간,
나는 또다른 삶을 살아내고 있었다.
문제처럼 보였던 일의 포장지를 벗겨
마땅히 가야 할 곳으로 보내고 있었다.
아버지가 말씀하셨다.
"책은 어디서 사면 되노?"
"아니에요. 제가 보내드릴게요."
"아니다. 내가 사야지. 내가 사고 싶다."
아버지는 책을 보내기도 전에 책값을 보내셨다.
책을 받고 단숨에 읽은 아버지가 엄마와 마음을 나누셨다.
"리인이가 빌라 살 때 많이 힘들었나 보네."
엄마는 내게 말했다.
"어렸을 때 일을 어떻게 그렇게 다 기억하고 있노.
기억 못 할 줄 알았던 일도 다 기억하네.
애들이 어리다고 모를 것 같아도 다 아는기라."
엄마의 마음은 어린 시절의 나에게로 와서 멈춰 섰다.
엄마와 나는 조용한 행성을 찾아 이사하던
일곱 번의 순간에 서서 서로를 바라본다.
내 곁에 멈춘 엄마의 걸음이
내가 낸 발자국 위에 포개지고
우리는 한 겹의 마음이 된다.
책을 만난 다음 날, 아버지가 전화를 하셨다.
"책을 어디서 사면 되노? 내 친구 아홉 명이 책을 산단다. "
어린 시절, 집에서 혼자 시간을 보내던 아버지는 이제 친구분들을 자주 만나신다.
친구분 농장의 과일 수확을 도와주시고, 함께 나들이를 가신다.
불면의 장마로 어두웠던 인생의 한낮에
아버지의 거울은 존재를 그대로 비추지 못했다.
두꺼운 구름에 해가 가려진 아침,
바깥보다 더 검게 보이는 자동차의 룸미러처럼
존재의 얼굴은 흐리고 검게 반사되었다.
이제 아버지의 생은 날이 갰다.
아버지의 거울은 환한 빛으로 존재를 반사하고
뒤에 서 있는 엄마와 나를 함께 비춘다.
어쩌면 감추고 싶었을 당신의 이야기가 세상에 나왔고,
아버지는 자기 자신이 아닌 아버지로서 책을 받아들이셨다.
아버지에게 내 책은
감추고 싶은 당신의 아픔이 아니라
알리고 싶은 딸의 작품이 되었다.
어제 아버지가 다시 전화를 하셨다.
"내 친구들이 책을 너무 잘 읽었다고
힘든데도 이렇게 잘 성장했다고 칭찬이 자자하더라.
그리고 한 친구가 책이 잘 됐으면 좋겠다고 후원금을
주더라."
아버지에게 배달되지 못하던 책은
이제 아버지 친구 분의 마음에까지 가 닿았다.
아버지의 삶의 순간을 함께 나누고, 추억하는 친구분의 응원에 내 책은
'삶을 연결하는 시간'의 매개체가 되었다.
우리 가족은 상처의 허물을 벗어던지고
순수한 아이의 눈으로 서로를 바라본다.
'가장 지독한 부패는 썩지 않는 것'
- 나희덕의 시 '부패의 힘' 중에서 -
책은 새로 태어났고,
우리 가족을 갇히게 했던 인식은
서서히 썩어 소멸되고 있다.
아버지의 불면과 그것에서 파생된 크고 작은 문제들을 접할 때마다
내 영혼을 단단하게 지키기 위해 분투했다.
내게 주어진 문제들을 해결하는 과정은
결국 나를 강하게 했다.
<삶의 모든 순간은 나를 위해 찾아온다> 중에서
사진 출처: 핀터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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