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의 발단을 이랬다. 고2 딸아이의 기말고사가 끝나는 금요일 12시를 기점으로 우리 가족은 일산을 벗어나 속초와 고성으로 2박 3일의 여행을 하고 돌아올 계획이었다...
띠링~ 떠나기 3일 전에 울린 이알리미(가정통신문 앱)~
4세대 나이스 오류로 인해 기말고사가 3일 연기되었습니다.
지독하게 무심한 문장이 핸드폰 화면에서 표류하고 있었다. 금요일에 끝나야 할 시험이 그다음 주 수요일에 끝난다는 것이었다. 그럼 그다음 주에 가면 되지 않냐고 하겠지만 남편은 외국을 커피숍 드나들듯이 하는 사람이라 스케줄 맞추기가 쉽지 않다. 다음 주 주말에는 우리에겐 쓸데없이 찬연한 오스트리아 빈에 있을 예정이었다.
휴직하고 인연을 끊고 싶었던 나이스와 이렇게 모질게 엮일 줄이야...
오랜만에 아들을 포함한 4인 공동체 여행을 꿈꾸던 나는 눈물을 머금고 숙소를 취소했다.
그러다 문득 한 달에 한 번 가는 북한산 등산 모임을 설악산에서 해보면 어떨까 하는 호기로운 생각이 떠올랐다. 실행력에 자부심이 있던 나는 바로 카톡방에 메시지를 날렸다. (나중에 울산바위의 끝없는 계단을 오르며 빗줄기인지 땀줄기 이었는지모를 수분집약체들이 주룩주룩 흘러내릴 때 메시지를 날린 내 손을 자르고 싶었다.)
2021년 2학년을 가르치던 동학년이었던 우리 모임 멤버들은 세상 쿨하게 방학의 시작을 등산으로 하자며 오케이 사인을 보냈다. 이렇게 6월 말, 우리의 7월 폭염 속 설악산 등반은 계획되었다.
2. 멋 모르고 좋은 첫째 날
제법 레이서 소리 좀 들어본 나이지만 설악산 등반 후 속초에서 일산까지 운전은 자신이 없었다. 자칭 타칭 '등린이'인 내 몸 하나 건사하기도 힘드니 말이다.(수학은 못하지만 분수는 잘 안다.) 고맙게도 우리를 등산의 세계로 인도해 주신 회장님이 운전대를 잡아 주셨다. 아침 8시 3명의 설악 회원은 집안의 짐은 내려놓고집 밖의 여정을 함께 할 짐을 싸들고 회장님 아파트 주차장에 모였다.
시내를 벗어나 강원도로 향하는 차에는 누구나 아는 설렘과 한 치 앞도 모를 무모함이 함께 존재했다. 여러 주제를 넘나들며 때론 유희하며 때론 분노하며 이야기를 풀어내는 동안 차는 어느새 대포항 공용주차장에 주차되었다.
"속초 왔으면 킹크랩은 먹어줘야지."
일행 한 명이 추천한 횟집에 앉았는데 서빙하시는 아주머니가 추천하는 킹그랩, 대게 세트 메뉴 가격이 상당했다. 가족끼리 왔으면 좀 더 저렴한 세트로 엄지손가락이 향했겠지만 1/N의 힘!, 맛있고 귀한 건 나 혼자 나부터 먼저 먹자는 애기정신(나를 사랑하는 정신)으로 과감하게 아주머니 강추 세트를 선택했다.영업에 성공하신 아주머니는 식사 내내 온몸에 친절을 장착하시고 각종 서비스 음식도 함께 내어 주셨다.
이유 불문하고 모든 게 맛있을 수밖에 없는 조건의 순간이었다.
You made my day! 오늘은 서로에게 좋은 순간을 만들어 준 날이겠다.
커피 한 잔 후 간단하게 장을 보고 울산 바위기 보이는 숙소에 짐을 풀었다. 시원하게 에어컨을 틀고 누워서 보이는 울산바위를 보며 '내일 저 바위 정상에서 이 숙소를 내려다보겠구나 생각하니 뭔가 뫼비우스의 띠처럼 돌고 도는 것 같아 피식 웃음이 나왔다.
《숙소에서 만난 울산 바위》
사전 조사 없이 떠나온 여행이라 더 과감할 수 있었을까? 가족들과 4년 전 케이블카를 타고 유람하듯 봤던 권금성만 기억나고 울산바위 등산 코스에 대해서는 지식이 하나도 없었다.
태초에 조물주가 금강산을 만들면서 전국 각지의 아름다운 바위들을 불러 모았다. 울산에 있던 울산바위도 금강산에 들어가고자 부지런히 길을 걸었다. 하지만 설악산에 이르렀을 때 금강산의 일만 이천 봉이 모두 완성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실망하여 그곳에 멈춰 자리를 잡게 되었다고 한다.
-네이버 지식 백과-
어릴 적 '생생 정보 통' 류의 프로그램에서 리포터가 영상과 함께 내레이션 해주던 내용이 어렴풋이 기억나는 듯하다. 자세히 바라다보니 바위모양이 어디론가 급하게 떠나는 모습 같기도 하다.
산의 암벽이 아기자기하게 따로 또 같이 솟은 북한산과는 다르게 360도 파노라마 뷰를 펼쳐놓은 듯한 장엄한 바위들과 그 사이에 멋들어지게 배치된 나무의 조화가 힘차고 굵은 선으로 조각된 울산바위의 매력에 푹 빠졌다.
일몰 보는 것을 좋아해 일몰 시간에 맞춰 고봉산에 뛰어 올라가는 나였지만 오늘 저녁은 해지는 게 아쉬웠다. 울산바위 근처로 붉은 노을이 퍼지더니 이내 어두워졌다.
내일 이른 아침을 등반을 기약하며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3. 니들이 더위를 알아?- 설악에서 폭염과 만난 둘째 날
설레서인지 잠자리가 바뀌어서 인지 잠을 설치다 새벽에 까무룩 잠이 들었나 보다. 부지런쟁이 회원 한 명이 아침 준비하는 소리에 잠을 깼다. 건강을 위한 FMD식단을 표방하지만 우리는 등산을 해야 한다는 걸출한 변명을 대며 계란과 바나나를 든든하게 먹고 8시 반이 되어서야 설악탐방지원센터로 출발했다.
총 11개의 공식 등산 코스 중 우리가 선택한 건 설악탐방지원센터에서 울산바위까지 총 3.9km 구간으로 중간에 흔들바위까지 덤으로 볼 수 있는 짧지만 알찬 코스이다.
하늘이 가을처럼 깊고 푸르니 구름은 더 하얀 미모를 뽐내서 사진으로 표현되는 날씨는 가을의 화창한 아름다움 그 자체였다.
《아직은 호기롭게 힘차게 반달가슴곰 동상 앞에서》
흔들바위까지는 갈만 했다. 9시부터 40분 정도 올라왔으니 햇빛도 더위도 경사도 내 폐가 견딜 만큼이었다. 흔들바위 앞에서 100년 전통의 포즈, 돌을 미는 포즈로 사진을 찍은 후 다시 울산 바위로 향했다. 사진빨 잘 받겠다고 입고 온 코발트블루에 '태평양 해변'이라는 뜻의 영어가 쓰인 면티는 등판이 다 젖어서 질척거렸다. 가방과 등판 사이에서 젖은 면티는 싫다는 사람 붙잡고 매달리는 엑스처럼 축축하게 들러붙어서 떨어질 생각을 안 하니 몸이 더 무거웠다. 이 한 끝의 차이가 이렇게 크다니, 다음에는 꼭 등산복 입고 와야지. 그러게 멋 부리다가 샘통이다.
몇 분을 올라갔을까 삐이~~ 소리와 함께 폭염주의보 문자가 왔다.
"와~~ 이런 날 설악산을 등반하다니 우리 진짜 대단하다."
대단하다는 의미에 무모하다가 포함된다면 진짜 인정한다. 생각해 보니 위대한 발견이나 실행도 무모함에서 시작되지 않는가? 대단한 게 맞는 걸로 결론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