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1.26 이집트 시와 - 다시 카이로로
동행의 마지막 날이다.
오후 8시 즈음에 나는 카이로행 미니 밴을 탄다. 그로부터 약 30여분 뒤, 그 애는 '메르사마투루'라는 휴양지로 가는 버스를 탔다. 메르사마트루는 시와와 알렉산드리아 중간에 위치해 있다.
그 애를 뒤로 하고 나는 미니밴에 올랐다. 미니밴에서 우리는 위챗을 통해 장문의 메시지를 주고 받았다.
오전부터 그 애와 츌링을 만났다. 우리는 고성 초입에 위치한 한 기념품 샵에 들렀다.
그 애는 햇빛을 피해가면서 매대 높이 걸린 옷들을 작대기로 꺼내 자신에 걸쳐 보였다. 마침내 하얀 드레스 하나를 골랐다. 이 작업에 약 60분이 걸렸다. 그 애는 내게 사장과의 옷 흥정을 부탁했다. 나는 웃으며 사장에게 어설픈 아랍어를 건넸다.
아스완부터 영문 모르게 부르터있던 그 애의 입술은 점점 매끄럽게 아물고 있었다. 고성 초입의 기념품 샵, 나는 거기서 그 애의 얼굴을 보느라 숨을 참았다. 숨을 내뿜고 들이쉬면, 그 호흡이 가져오는 반동에 떨리는 시야조차 멈추고 싶었다.
그 애와 츌링은 소금호수에 갔다. 다녀오는 동안, 나는 근처 카페에 앉아 기다렸다.
카페에서 나는 몇몇 중국어를 암기하고 있었다. 낯간지런 말들이었다. 그러다 인근을 돌아다녔다. 이집트 잼민이들과 사진을 찍었다. 그리곤 고성에 다시 올라, 노을을 또 한 번 담았다.
약 다섯 시간 뒤에 그 애는 도착했다. 시간은 어느덧 오후 일곱 시였다. 내 미니밴이 출발하기까지는 한 시간 남짓 남아 있었다.
츌링은 메르사마투루 행 버스를 예약해야 했다. 분주히 인근을 쏘다녔다. 30분 동안 츌링은 보이지 않았다.
그 30분 동안 그 애와 나는 정류장 앞, 짚으로 엮은 의자에 나란히 앉아 있었다. 그 애는 한동안 휴대폰을 만지작 대며 찍은 사진들을 넘겨 보았다. 이내 "I will miss you"라는 내 한 마디에 조용해졌다.
우리는 번역기를 켰다. 나는 그 애에게 좋아한다고 말했다. 카이로 박물관에서 마주치고, 9일만에 처음 꺼낸 말이었다. 그 애도 내가 좋다고 했다. 역시나 처음 들은 말이었다.
나는 네가 더 좋아지면, 귀국해서 너무 그리울까봐 걱정된다고 하였다. 그 말에 그 애는 위 사진처럼 답하였다.
우리가 각자의 나라로 돌아가서도 서로가 그립다면, 우리는 특별한 관계가 될 수 있을까, 그렇게 물었다. 그 애는 "오브 콜스"라고 답하였다.
그동안 서로 꺼내지 않았던 말들을 나눴다. 그러나 9일간 묵힌 말들을 나누기엔, 번역기는 못 미더웠고 30분은 짧았다.
이내 정류장 직원이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네가 그리울 거라고 짧은 인사를 나누고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밴 지붕에 짐을 싣는 15분동안, 나는 그 애를 서른 번 쳐다봤다. 그 애는 웃으며 휴대폰으로 나를 찍고 있었다.
밴은 곧 출발했다. 나는 그 애에게 위챗으로 장문의 메시지를 보냈다. 앞선 9일간 혼자 고민했던 것들이 압축된 문장들이었다.
시와에서 카이로까지는 10시간이 넘게 걸린다. 아스팔트조차 깔리지 않은 이집트의 도로 위에서 데이터는 통하지 않는다. 장문의 메시지를 보내고, 열 시간 동안 답장은 확인할 수 없었다. <月亮代表我的心> 노래를 들으며 창 밖 사막과 밤하늘을 바라 보았다.
덜컹이는 밴에서 조금씩 눈을 붙이다 보면, 어느새 카이로에 도착해 있었다.
데이터가 들어왔다. 그 애로부터 답장이 도착해있었다. 장문이었다.
아마 당신은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저는 또렷이 기억하고 있습니다. 나일강 위에서, 우리가 돌아가는 배에서 기다리던 중 제가 난간에 서서 당신에게 담배를 피우냐고 물었습니다. 당신은 난간 아래에서 웃으며 대답했고, 그 순간 햇빛이 당신에게 딱 비추고 있었습니다. 그 찰나에 저는 당신의 눈을 바라보았고, 아주 선명하게 당신을 볼 수 있었습니다. 설령 이후에 우리가 다시 만나지 못한다 하더라도, 기억이 흐릿해진다 하더라도, 저는 이 순간을 오래오래 기억할 것입니다.
우리가 다시 만나게 된다면, 나는 당신을 깊이 안고 싶습니다.
미사여구나 형용사를 배제한 글이 잘 쓴 글이라고 배웠다. 필자의 감정이 글에 들어가버리면, 정작 독자가 감정을 느낄 여지가 사라지기 때문이다. 감정 형용사 없이도 그 감정을 느끼게 하는 글이 '수준 높은' 글이라고 했다.
그런 맥락에서, 그 애의 메시지는 훌륭했고, 내 메시지는 유치했다.
그리고 나는 그 애가 언급한 순간을 기억한다. 아스완의 필레신전 구경을 마친 뒤, 뱃사공을 기다리던 나일강의 선착장이었다. '담배를 피냐'는 그 애의 질문에 나는 'Sometimes'라고 답하였다. 내 반문에 그녀도 'Sometimes'라고 답했다. 그 뒤로 우리는 흡연을 명분 삼아 흑색 구정물이 고인 카이로 구석에 함께 서있곤 했다. 그때마다 나는 짧은 말을 망설였다. 연초는 겨우 3분이면 필터에 닿았다. 그래서 망설임은 늘 미완이었다.
귀국한 뒤로도 우리는 한동안 연락을 나누었다. 우리는 "I miss you"나 "I like you", 혹은 좀 더 노골적인 감정 표현을 적어 넘기고는 하였다. 직접 구두로 옮기지 않아서인지, 한창 낯선 중국어여서 그랬는지. 한국어로는 쉽게 못 할 오글거리는 말들을 어찌도 그리 쉽게 전했었는지. 나는 다음 여행지는 그 애가 있는 광저우여도 좋겠다고 늘 생각했었다.
그리고 3월에 접어들며 우리의 연락은 점차 줄어들었다. 4월 초입에는 마지막 연락을 나누었다. 아마도 우리는 잘 맞지 않는 것 같다고, 좋은 사람을 만나라는 내 문자에 웃으며 알았다고 그 애는 마지막으로 답했다.
그날 이후로 괜히 덧댄 말들은 참 소용 없었다.
어쩌면 우리는 처음부터 이어질 수 없었다고 생각한다. 그 애와의 만남도, 여정도 운명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붕- 떠 있었다.
하지만 붕 뜬 것은 기어코 중력에 추락하고야 마는 것이다. 해외의 해방감과 낯섦은 우리를 가까워지게도 하였지만, 감정을 부풀려 한 사람을 원래답지 않게, 때로는 바보처럼 만드는 것이었다. 나는 귀국한 뒤로도 한동안 감상에 취해있었다. 마치 사춘기 중학생 같았다. 서툴고 투박했다. 반면 그 애는 직장인이었다. 바쁘게 업무에 치이다 보면, 그 애는 취준생인 나보다 몇 발짝은 더 빠르게 현실로 복귀할 수 있었다.
나도 이제는 모두 '예전 일'로 치부할 수 있다. 다이소에서 산 천 원짜리 샴푸와 수분크림이나, 몇 개 챙기지도 않은 추레하고 꾸겨진 복장, 생수 한 병 살 돈이 아까워 공항 세면대에서 수돗물을 홀짝이던, 함께할 시간도 돈 때문에 주저하던, 그토록 꼬질꼬질하고 초라한 모습으로 잘도 청춘다웠네 싶다. 그것에는 이집트의 흙먼지나 매연, 혹은 담배 냄새, 황토의 색감같은 것들이 배여 있다.
한때는 4월에 내리는 이례적인 폭설에, 혹은 27살에 처음 빼보는 사랑니 같은 것들에 의미부여를 하고는 했었다. 서울과 광저우는 천 리보다 더 멀어서, 우연히 스칠 기대보단 그런 신비적인 것들에 기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모든 것들은 때가 있어서, 엉성한 아쉬움을 남기고 떠난다. 덕분에 나는 타인과의 관계에서 지니는 내 고약한 습관 하나를 깨달았다. 아마도 철이 조금 더 든 것 같다고 스스로 생각을 할 때쯤, 편의점에서 더 이상 신분증을 검사하지 않았다. 외모도 생각을 따라가나 보다.
27일은 이집트 카이로에서 하루를 보냈다.
그리고 익일 28일, 그리스 아테네로 떠난다.
그리스에서는 '아테네 - 메테오라 - 수니온 - 산토리니'를 다녀왔다.
그리스는 유럽이다. 튀르키예, 요르단, 이집트와 달리 '모험'보다는 '관광'에 가깝지 않을까, 그런 생각들을 하였다. "아, 내 고생은 끝이구나. 이제 편하게 여행하겠네"라고 생각했다.
착각이었다. 역시 오디세우스의 나라, 그리스도 모험의 연속이었다. 이집트 못지 않았다. 산토리니에서는 이례적인 지진으로 인한 대규모 피난 행렬에 섞여 섬을 탈출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