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2월 26일 일요일
크리스마스는 끝이 났다. 12월은 1년 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달이다. 거리를 수놓은 화려한 조명들과 트리 장식들은 나를 설레게 한다. 내가 처음 크리스마스를 좋아하게 된 건 중학교 때 봤던 영화 <러브 액츄얼리> 때문이다. <러브 액츄얼리>는 당시 내 마음을 제대로 저격한 영화였다. 사실 영화의 내용은 크게 관심이 없었다. 영화가 보여준 크리스마스 시즌 런던의 풍경이 그저 좋았다. 특히, 중년 부부로 분한 고 알란 릭맨과 엠마 톰슨이 큰 백화점에서 선물을 고르는 장면은 내 머릿속에 오랫동안 남아있었다. 그들이 무엇을 하는지에는 딱히 관심이 없었다. 그저 그 장소가 좋았다. 화려한 트리, 북적이는 사람들, 반짝이는 조명. 그런 것들이 내 마음속에 자리 잡았다.
시간이 흐르고, 최근에 <러브 액츄얼리>를 다시 보았다. 그런데 이번에는 예전과 같은 감흥이 들지 않았다. 이야기에 집중하면서 보았기 때문이다. 영화는 옴니버스 형식을 취한 작품이다. 어린 첫사랑에 빠진 아들을 도와주는 아버지(토마스 생스터와 리암 니슨이 연기했다.)의 이야기를 빼면, 죄다 이해되지 않는 사연들이었다. 그중에서도 결혼한 친구의 아내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마크(앤드류 링컨 분)의 사연은 최악이다. 물론 마음이 갈 수도 있겠지. 그렇지만 크리스마스에 그 집까지 찾아가서 피켓으로 고백하는 건 너무 끔찍하다. 영화가 개봉했을 당시 많은 사람들이 이 장면을 가장 로맨틱하다고 꼽았다. 실제로 이 피켓 고백 신을 패러디하거나 실생활(...)에서 따라 하는 경우도 많았다. 최악이다.
영화는 더 이상 나에게 아무런 감흥을 주지 못했다. 그렇지만, 크리스마스는 여전히 나를 설레게 한다. 딱히 무슨 일이 일어나길 바라는 마음은 아니다. 그저 반짝이는 거리와 북적이는 사람들을 보는 것이 좋고, 설렘으로 가득 찬 마음들이 느껴져서 좋다. 물론, 나에게 일어난 일도 기대됐다. 아내와 함께 보내는 휴일. 이번 크리스마스 시즌에는 참 많은 것을 했다. 놀이공원을 갔고, 같이 요리를 해서 먹었고, 쇼핑몰도 갔고, 동네 산책을 했다. 하나 같이 다 즐거웠고 행복했다. 이제 결혼한 지 3년이 넘었다. 함께 있으면 싸울 일 없이 즐겁기만 하다. 평소에도 즐겁지만, 크리스마스라는 소소한 이벤트가 우리를 더 행복하게 만들어줬다. 그래서 이 시즌이 좋다. 평생 이 행복을 지키며 사는 것이 나의 유일한 목표가 됐다.
쇼핑몰에 가는 길에 차에서 애플뮤직의 'Jazz Christmas' 플레이리스트를 틀었다. 음악은 크리스마스를 좋아하는 또 다른 이유 중 하나다. 그중에서도 제프 해밀턴 트리오가 연주한 "Santa Baby"가 있었다. 많은 이들이 아리아나 그란데 버전으로 익숙한 노래인데, 원곡은 1953년에 얼사 키트가 부른 버전이다. 이후 아리아나를 비롯해 수많은 가수들이 리메이크한 불멸의 캐럴 명곡인데, 생각보다 원곡자를 아는 사람이 많지 않다. 뮤지컬 배우로 죽기 직전인 2007년까지 활동한 얼사는 일명 '백악관 사건'으로 한때 악명(?)을 떨쳤다. 간단히 요약하면, 1968년 린든 존슨 대통령 시절 백악관 오찬 모임에 초청되었는데, 베트남 전쟁에 대한 의견을 묻는 영부인의 질문에 '이 나라는 아이들은 전쟁에 보내 총살시키고 불구로 만든다. 반전 운동에는 이유가 있다'라는 식으로 강경한 답을 쏟아낸 것이다. 이후 그는 CIA가 조직적으로 만들어낸 각종 루머들에 시달려야만 했다.
"Santa Baby"도 부드러운 보컬과 다르게 굉장히 직설적인 곡이다. 그는 1년 동안 착하게 지냈다며 산타에게 퍼 코트, 고급 승용차, 아파트, 보석 등 다양한 선물들을 직접적으로 요구한다. 심지어 수표까지 요구하고, 트리 장식은 티파니에서 사 온 것으로 해달라고 말한다. 곡의 분위기에서 느껴지지만, 사실 여기에서 말하는 '산타'는 연인이다. 그래서 'Santa baby, hurry down the chimney tonight (산타, 오늘 밤 굴뚝으로 서둘러 내려와요)'라는 가사가 묘하게 섹슈얼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당시에는 재즈가 오늘날의 힙합처럼 가장 직설적이고 노골적이며 반항적인 음악이었다. 지금은 어딘가 고풍스럽고, 누군가에게는 고루하게 느껴지는 고급 음악의 이미지가 있지만.
곡의 가사나 배경과는 상관없이 내게 "Santa Baby"는 크리스마스의 낭만을 더해주는 음악이다. "All I Want For Christmas Is You"나 "Last Christmas"도 좋지만, 올해는 왠지 "Santa Baby"가 아내와 내 입에서 맴돌았다. 우리 부부는 항상 재미있다. 매번 농담과 장난이 넘쳐난다. "Santa Baby"도 우리에게는 장난스러운 노래가 되었다. 나는 음악에 대한 글을 쓴다. 그래서 음악의 배경과 가사 같은 것들을 진지하게 글로 풀어낸다. 그런데 실제로 우리에게는 그런 것들이 크게 상관이 없다. <러브 액츄얼리>의 내용이 크게 상관없었던 것처럼, "Santa Baby"도 그 내용이 어찌 되었든 그저 2021년 12월의 우리를 마무리해준 노래가 되었다. 그렇게 음악은 언제나 본연의 의미보다는, 들었던 시간, 함께 들었던 사람, 들었던 풍경들로 개개인의 마음에 다시 채워진다. 이 글의 목적은 그것이다. 내 직업에 따라 음악이 가진 본연의 배경과 의미도 설명하겠지만, 그것을 대체한 내 개인의 경험을 적어내리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