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 명량에서 왜군에게 대승을 거두다
원균과 윤두수를 비롯한 일부 서인 세력의 모함을 받고 이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에서 파직당한 뒤 원균은 새로운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어 일본 수군과 접전을 벌였으나 칠천량 해전에서 대패하여 다수의 장병과 대부분의 전선을 잃고, 조선은 제해권을 상실하였다. 이에 선조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자 이순신을 다시 복권하여 삼도수군통제사로 기용하였다. 선조는 대신 품계를 정3품의 계급으로 낮춰 조선 수군의 지휘 체계 혼란을 야기하였다.
당시 수군 수사의 기준 품계인 정3품을 가진 장수들이 넘쳐났다. 계급이 같은데 보직만 다른 상황이 일어나니 각 장수들의 불만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이처럼 조선 수군은 지휘 체계의 엉망으로 각종 잡음이 끊이지 않았으며 시작부터 불안한 출발을 하였다.
더욱이 조선 수군에게 남은 전선은 겨우 12척에 불과하였다. 칠천량의 패전의 손실이 커서 선조는 수군을 폐지하려고도 하자 이순신은 선조에게 다음과 같은 장계를 올려 수군폐지불가론을 펼쳤다.
“ 지금 신에게는 아직도 전선 12척이 남아 있나이다. 죽을 힘을 다하여 막아 싸운다면 능히 대적할 수 있사옵니다. 비록 전선의 수는 적지만 신이 죽지 않은 한 적은 감히 우리를 업신여기지 못할 것입니다. ”
그 후, 이순신은 남해안 일대를 돌아다니며 흩어진 병사들을 모아 수군 재건에 전력을 다했다. 이순신은 음력 8월에 일본 전투선이 어란포(현재 해남군 어란리 근처)에 나타난 것을 격퇴한 후, 음력 9월에 일본 함대가 어란포에 들어온다는 보고를 받고 벽파진에서 해남의 우수영(右水營)으로 진을 옮겼다.
10월 25일 새벽 3~4시 경 어란진에서 출병한 일본 수군 130여 척이 7~8시 경 순조(順潮)를 타고 울돌목으로 접근했다. 이순신은 보고를 받고 즉시 닻을 올리고 울돌목으로 향했다. 이순신 상선의 즉각적 포격으로 세키부네 3-4척이 격침되며 전투가 시작되었다.
일본군에게 하나의 악재가 발생하는데 정오 즈음이 되자 점차 조류의 방향이 바뀌기 시작한 것이다. 조류의 방향이 조선 수군에는 순조(順潮)가 되고 일본 수군에 역조(逆潮)가 되어, 일본 수군에게 대단히 불리한 상황이 조성되었다. 역류가 흐르는 상황에서 좁은 해협에 많은 수의 전선을 끌고왔던 일본 수군에게 급한 역류가 흐르는 상황에서 배를 운신하며 전열을 정비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웠다.
일본 수군은 조류의 역조(逆潮)와 조선 수군의 당파로 인해 전혀 반격할 수 없었으며, 또한 군선이 많은 것이 오히려 독이 되어 군선끼리 서로 부딪히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군감 모리 다카마사는 바다에 빠졌다가 구조되었고 도도 다카토라는 부상을 당했다. 군감이 바다에 빠졌다가 구조되고, 총 사령관이 부상을 당한 것으로부터, 일본 본대도 큰 피해를 입었던 것으로 보인다.
결국 130여 척의 대함대를 10여 척으로 추격하는 형세 되었고 일본 수군은 유시(酉時 오후 5시~7시) 무렵, 물살이 느려지고 바람이 일본 수군쪽으로 부는 것을 이용, 퇴각하였다.
실제 전투에 참여한 일본 수군의 전선 130여 척 중 30여 척(31~33)이 격침되었고, 왜군의 중형 군선에는 약 100명씩 타고 있었으므로 최소 3000여 명의 전사자가 났을 것으로 예상할 수 있다. 반면, 조선군의 전선은 단 하나도 격침되지 않았다. 다만, 순천감목관 김탁과 이순신의 종 계생이 전사하였고, 안위의 전함의 격군 일고여덟명이 물에 빠져 죽은 것을 통해 조선군 전사자 수를 대충 유추해볼 수 있다. 이 전투는 조선이 정유재란을 승리로 이끄는 결정적 전투가 되었다.
명량해전으로 인해 일본군의 수륙병진작전이 모조리 무산되었으며, 일본군은 남해안 일대에 분산되어 왜성을 쌓고 농성전에 들어가게 된다. 이후 정유재란은 농성하는 일본군을 조명연합군이 수륙 양면에서 협공하는 공성전으로 바뀌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