흙수저의 희망, 정주영이 태어나다
강원도 통천군 송전면 아산리에서 태어나 호도 아산으로 지은 정주영은 송전소학교 졸업한 것이 학력의 전부다 .찢어지게 가난한 빈농의 장남으로 태어나 농사를 해야한다는 아버지에 맞서 4번이나 가출을 해서야 서울로 도망치는데 성공한다.
그러나, 학력도 없고 배운것도 없는 정주영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어서 공사판, 노가다판을 전전하다가 19세에 신당동 복흥상회라는 쌀집에 점원으로 취직한다. 그리고, 성실성을 인정받아 3년후인 23세에 복흥상회를 인수받아 '경일상회'를 차렸다.
하지만, 일제의 쌀배급정책에 따라 가게가 문을 닫을 수 밖에 없었고 이에 남은 돈으로 북아현동에 위치한 아도써비스를 인수하여 흑자로 돌려놓지만 직공의 실수로 불이나 잿더미가 되고 만다. 그러나, 그런 정주영의 성실함을 눈여겨 본 한 독지가의 지원으로 신설동에 무허가 수리공장을 세운다.
그러나, 이번에는 일제의 총동원령에 의해 강제합병되면서 쫓겨난다. 남은 돈으로 트럭을 사서 운수업을 시작했지만 일감을 주는 이와 불화로 트럭사업을 접는다.
이런 실패의 투성이 속에서 해방을 맞은 정주영은 1946년 서울 초동에 현대자동차공업사를 내걸어 자동차 수리업을 시작하고, 이듬해에 은행에서 대출을 받아 현대토건을 시작으로 건설업을 시작했다. 이 두 회사가 나중에 현대건설이 된다.
그러다 6.25가 터지고 아산은 주한미군 통역장교를 지낸 동생 정인영의 도움으로 미군 부대 공사를 도맡아 하며 번창을 하지만 휴전이 되고 미군 공사가 전면 스톱되면서 파산의 위기를 맡는다.
이 위기를 극복한 이후부터의 정주영은 신화적인 존재가 된다. 500원 지폐를 가지고 조선소 지을 차관 460억을 빌리는가 하면 조수간만의 차로 조선소 건립을 짓기가 어렵자 폐유조선 두척으로 바닷물을 막아 조선소를 지은 일화하며, 오일쇼크가 일어나자 가장 먼저 중동으로 가서 유럽의 절반 가격으로 수주를 따내 압도적으로 한국에 중동붐을 일으켰으며, 1988년 서울 올림픽 유치를 위해 일본이 비싼 시계를 위원들에게 선물하자 돈으로 승부가 되지 않는다 판단하여 꽃을 돌려 마음을 돌려 서울 올림픽 개최를 하게 하기도 하였다.
정주영의 일화는 너무 많아서 하나하나 말하기가 벅찰 정도다. 그만큼 정주영은 가진 것 없는 빈농의 자손으로 태어나 수많은 실패와 시련을 오뚜기처럼 이겨내 굴지의 회사를 세운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정주영의 라이벌로 불리며 만석꾼지기 부친의 재산으로 일본 유학과 분에 넘치는 자본금으로 넉넉하게 시작한 금수저 이병철과는 그 출발부터가 달랐던 셈이다 .
흙수저들의 희망, 정주영이 태어난 해가 1915년 11월 25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