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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의오늘사건] 1812년 1월 31일

홍경래, 조선의 모순에 농민반란으로 대항하다

by 나그네

조선 후기사회·경제적인 역량이 성장함에 따라 여러 사회모순에 대한 저항의 분위기가 확산되어 갔다. 교육 기회가 늘어남에 따라 지식인이 양산되고, 경제력을 바탕으로 무사로서 입신하려는 사람들도 많아짐에 따라 정부에서는 문무 과거의 급제자를 크게 늘렸지만, 종래의 관직 체제와 인재 등용 방식으로는 더 이상 그들을 포섭할 수 없어 불만 세력은 점점 늘어났다. 특히 평안도는 활발한 상업 활동을 바탕으로 빠른 경제 발전과 역동적인 사회상을 보이고 있었으나 정치권력으로부터 소외되고 농민들의 차별대우가 있었던 점도 있다.

표면적인 이유로는 조선 시대에 서북인을 일반적으로 문무 고관에 등용하지 않았다는 것으로, 격문에서 홍경래는 “임진왜란 때 재조(再造)의 공이 있었고, 종묘의 변에는 양무공(襄武公, 정봉수)과 같은 충신이 있었다. 돈암(遯庵, 선우협)·월포(月浦, 홍경우)와 같은 재사가 나도 조정에서 이를 돌보지 않고, 심지어는 권문세가의 노비까지 서북인을 평한(平漢)이라고 멸시하니 분개하지 않을 수 없다. 국가 완급(緩急)의 경우에는 서북인의 힘을 빌리면서도 4백 년 동안 조정에서 입은 것이 무엇이냐?”라고 하였다. 물론 이는 그저 중앙 정계에 진출하지 못하는 서북인의 불평불만을 이용하여 거사의 첫 조건으로 내세워 민심을 얻기로 꾀하였던 것이라고 하겠다.


홍경래는 준비를 하면서 기회를 보다가 1811년(순조 11년)에 종래에 없었던 큰 흉년이 들게 되어 민심이 흉흉한 틈을 타서 궁민(窮民)을 끌어들여 스스로 평서대원수라 칭하고, 가산·박천을 함락시키고, 곽산·정주를 점령하고, 선천의 이서의 여러 고을을 함락시키고, 안주를 공략할 방책으로 거병하였다.

1811년 음력 12월 18일(양력 1812년 1월 31일) 삼경에 가산군청을 습격하여 군청을 점령하고 난을 일으켰다. 봉기는 한때 정주성을 중심으로 청천강 이북 지역을 거의 장악하였으나 5개월 만에 평정되었다.


이때 홍경래는 총에 맞아 죽고 지휘부 다수는 포로가 되어 한양으로 압송된 후 음력 5월에 참형되었다. 이때 2,983명이 체포되어 여자(842명)와 열살 이하의 남자 소년(224명)을 제외한 1,917명이 전원 처형되었다.


홍경래의 난은 많은 준비와 세력을 등에 업은 대규모 반란이었으나, 진행 중 몇 전투에서 패하여 기세가 수그러들자 빠르게 진압되어갔다. 이는 홍경래 세력이 같은 목적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닌 각자 다른 이해를 가지고 모여든 세력이었던 것이 이유이다. 처음에 성공을 거두어 기세가 강했을 때는 전력 이탈이 없었으나, 몇 번 실패를 하면서 가능성이 낮아지자 발을 빼려고 하는 사람들이 생겨났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반란군 내부에서 분란도 있었고 도중에 홍경래가 암살 기도를 겪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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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경래의 난은 극도로 피폐한 조선 말기의 생활불안과 억울한 감정에서 오는 위정자에 대한 반항이라는 평가도 있다. 비록 정부의 힘으로 평정되기는 하였으나, 정치의 폐단이 가시지 않고 이후에도 홍경래의 여당(남은 잔당)이라 자칭하며 사서 표현에 의하면 흉패한 행위를 한 것 등으로 보아 홍경래 난은 일시 돌발적인 군란(軍亂)이나 민란에 그치지 않았다. 그 여파가 파급되어 민중의 동요는 걷잡을 수 없이 되었으며 철종 때 곳곳에서 민란이 계속되었던 것도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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