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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의오늘사건] 1950년 2월 9일

조지프 매카시, 당원 집회에서 반공연설로 매카시즘이 시작되다

by 나그네

상원의원 재직 초기 매카시는 잘 알려지지 않은 초선 의원이었다. 그러던 중 1950년 1월 7일 자신의 정치적 조언자들로부터 귀가 번쩍 뜨일 말을 듣게 되었는데, 그것은 바로 '반공'이었다. 1949년 공산주의 국가인 중화인민공화국의 등장, 소비에트 연방의 원자 폭탄 실험과 중앙유럽·동아시아에서의 공산주의 영향력 증대, 그리고 당시 미국을 휩쓸던 제노포비아(외국인 혐오증) 등은 반공의 가치를 크게 돋보이게 만들었다. 그로부터 한 달 후 웨스트버지니아주의 휠링에서 열린 공화당 부녀자 당원 집회에서 행한 반공주의 연설에서 이른바 매카시즘의 포문을 열기 시작했다. 매카시의 주장은 공산주의자들이 사회 각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으며, 그 명단도 갖고 있다는 것이었다.

매카시의 연설로 미국 전국은 큰 충격에 휩싸였다. 그런 와중에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많은 미국 군인들이 전쟁에서 희생되면서 국민들은 두려움과 괴로움에 사로잡혀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고발 열풍에 빠져들게 되었다. 그러나 매카시는 상원에서 공산주의자들이 활동하고 있다는 증거를 제시하지 못했고, 그에 대한 청문회도 열게되었지만 , 1950년대 미국 사회는 "매카시 시대"로 불릴 정도로 반공주의의 바람이 몰아쳤다. 또한 매카시의 반공주의 발언에서 유래한 매카시즘이라는 용어는 극단적인 반공사상을 지칭하는 일반용어로 자리잡았다. 1952년 재선된 그는 계속 공산주의자라는 의혹을 받는 사람들에 대한 조사를 시도하였다.


매카시가 이끄는 비미활동위원회(非美活動委員會, Committee on Un-American Activities)의 공개 청문회에 첫 1년간 소환된 증인은 214명이었던 데 반해 비공개 청문회에는 395명이 소환됐다. 또 공개 청문회 녹취 기록은 5671페이지지만 비공개 청문회 녹취는 8969페이지에 달한다. 매카시가 지목한 단체나 인사는 공산주의자라는 의심을 받았다. 매카시는 4년간 미국 정가에서 가장 유력한 인사였다.


1953년 드디어 공화당이 오랜 민주당 정권을 뒤집고 집권에 성공하였으며, 선거에 승리하여 다수당이 되면서 상황이 반전되기 시작했다. 공화 민주 양당은 오랜 매카시즘의 광풍에 피로감을 느끼고 있었으며, 공화당은 집권에 성공하면서 매카시즘에 대한 매력을 잃었고, 매카시가 점점 통제불능의 상황에 빠지는 것을 우려했다.


일부 공화당의원들은 양심선언을 통해 "독재자의 방법으로 자유를 지켜서는 안된다."고 개탄했으며 미국 연방대법원도 미헌법의 제정정신에 따라 국가안보보다는 사상과 표현의 자유를 중시하는 판결을 내리기 시작했다. 이로써 매카시즘은 그 종말을 맞이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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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매카시즘으로 큰 덕을 본 집단이 있었으니 존 애드가 후버가 이끌던 F.B.I였다. 후버는 매카시즘을 가장 열성적으로 이용하여 그가 이끌던 F.B.I를 미국내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집단으로 성장시켜 지금의 위치로까지 격상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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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윤석열을 지지하며 멸공, 반공을 외치는 이들은 모두 조작의 명수 매카시의 후예들인 셈이다

매카시즘의 그 시작을 알린 조지프 매카시가 웨스트버지니아주의 휠링에서 열린 공화당 부녀자 당원 집회에서 연설을 한 날이 1950년 2월 9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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