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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의오늘사건] 1919년 2월 8일

일본 도쿄에서 독립선언을 외치다

by 나그네

1918년 와세다대학 철학과 학생이던 이광수는 베이징에 건너가 체류 중에 제1차 세계대전의 휴전, 민족자결주의, 윌슨 강령에 관한 소식을 들었다. 중국인들은 이 소식을 듣고 파리 강화 회의에서 중국의 완전한 독립이 이루어지기를 기대하였다. 이광수도 조선 독립의 희망을 품었으며, 파리강화회의에 중국대표 주정샹, 구웨이준, 후웨이더 등이 베이징을 떠난 후 이광수는 서울로 돌아가 현상윤 그리고 최린과 독립운동을 논의하였다. 이들 셋은... 모두 변절하여 친일파가 된다는...


이광수는 11월 동경으로 돌아가 와세다대학의 정경과에 있던 최팔용을 만나 결의를 밝혔고, 최팔용은 백관수, 김도연, 서춘, 김철수, 최근우, 김상덕 등의 동지를 얻었다. 이광수는 원문을 쓰고 영문으로 번역을 하였다. 최팔용은 이광수가 상해에 피하여 있을 것을 권유하였고, 이광수는 이 요구를 따라 상하이로 피신하였다.

본 독립선언은 만주 지린에서 발표되었던 무오 독립선언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상해에서 활동하고 있었던 김규식의 지시에 따라 조소앙이 동경에 파견되어 유학생들을 지도하여 이루어지게 되었다.


동경의 기독교청년회관(재일본도쿄조선YMCA 현 재일본한국YMCA)에 모여든 조선 재일 유학생 400 ~ 600여 명 앞에서 최팔용이 ‘조선청년독립단’ 발족을 선언하고 이광수가 기초한 2·8독립선언서를 백관수가 낭독했다. 이들은 "조선의 독립국임과 조선인은 자주민임을 선언"하였고, "최후의 일인까지 최후의 일각까지 민족의 정당한 의사를 쾌히 발표하라"며 민족의 궐기를 촉구했다.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후 가도로 나선 학생들은 최팔용의 사회아래 대회선언과 결의를 열광 속에 가격하고 독립운동의 구체적인 방향을 논의할 때 일본 경찰들이 들어닥쳐 해산을 명하였다. 그러나 참석자들은 이를 거부하여 큰 소란이 일어났다. 이들은 일경과 몸싸움을 벌이다 강제 해산되고 사회자 최팔용 외에 약 60명이 검거되었고, 8명의 학생들이 기소되었다. 그러나 학생들은 굴복하지 않고 2월 12일 오전에 50여 명의 조선인 학생들이 청년회관에서 독립운동을 협의하다가 검거되었다.


이렇게 2월 한 달 내내 조선인 학생들의 독립운동이 일어났다. 이는 이광수에 의하여 조선과 해외에 보도되었으며, 이 사건은 다음 달 3월 1일 서울에서 이루어진 3·1 독립선언의 도화선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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