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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의오늘사건] 1971년 3월 11일

노블레스 오블리제의 화신 유일한, 고귀한 곳으로~

by 나그네

유일한은 조선 평안도 평양부에서 재봉틀을 파는 일로 자수성가한 상인 유기연(柳基淵)과 김기복(金基福)사이의 6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독실한 개신교 신자인 아버지 유기연은 미국 감리교에서 조선인 유학생을 선발한다는 말을 듣고 1904년, 당시 9살에 불과한 큰 아들을 미국으로 유학을 보낸다.

20180408_180659_1.png 하와이에서 독립운동 단체인 대조선 국민군단을 창설하고, 대한인 국민회를 결성한 박용만

배에서 아버지가 환전해 준 미국 돈을 잃어버린 유일한은 인솔자이자 독립운동가인 박용만의 배려로 미국 네브래스카주에서 살던 독신자매인 태프트 자매에게 입양되었다. 침례교회 신자들인 태프트 자매는 아침에 일찍 일어나 성서 읽기와 기도를 한 뒤, 밭에서 하루종일 일하는 성실하고 검소한 삶을 통해 기독교의 노동윤리를 실천했으며, 어린 유일한에게 영어를 가르쳐서 미국 사회에 적응하도록 배려했다.


초등학교에서 인종차별로 서러움을 겪기도 하지만, 강한 성격으로 극복했다. 독립운동가 박용만이 독립군을 기르기 위해 만든 헤이스팅스 소년병 학교에 1909년 입학한 그는 낮에는 농장에서 일하고 밤에는 공부했으며, 방학 때는 신문배달을 하면서 자신의 힘으로 살았다.


미시간 대학교에 입학한 유일한은 뛰어난 운동실력을 발휘, 장학금을 받으며 미식축구 선수로 활약한다. 1919년 3.1운동 직후, 서재필이 소집한 제1차 한인의회에 참여하였다. 1922년에 미시간 주립 대학교 대학원에서 수학하였고, 1929년에 스탠퍼드대학교 대학원에서 국제법을 공부하였다.

20250302_142014.png 1947년 해방 이후 귀국하는 유한양행의 기업 로고를 만들어 줄 정도로 친밀했던 서재필 (좌측부터 김규식, 서재필, 여운형)

자신의 힘으로 대학교를 졸업한 그는 고등학교 졸업 후 발전기회사에서 일한 경험을 살려, 제너럴 일렉트릭사에 취직하고, 이후 라초이 식품회사(주)를 설립하였다. 사업 번창 이후 중국계 미국인 여성이자 소아과 의사인 호미리와 중매결혼했다. 1925년에는 서재필과 New Il-han & Co. 를 설립하기도 했는데, 후에 서재필은 유일한이 귀국할 때 유한양행의 버드나무 CI를 제작하여 선물할 정도로 유일한을 아꼈다.

1926년 종로 2가에 설립한 유한양행 본사

1926년에 귀국하여 종로2가에 유한양행을 설립하고, 한민족의 건강유지에 필요한 결핵약, 1933년에 처음 개발한 진통소염제 안티푸라민, 혈청 등을 판매했으며 부인 호미리 여사도 중일전쟁으로 조선의 의약품 부족이 극에 달하자, 소아과 병원을 개업하여 저렴한 가격에 환자들을 치료하였다. 유일한은 유한양행을 경영할 때 항상 윤리경영을 실천하였는데, 1936년 한국최초로 종업원 지주제 즉 주주자본주의를 실시하였다.


이후 회사의 운영을 동생에게 맡기고 미국으로 잠시 유학을 떠났다가 태평양 전쟁으로 인해 미국에 체류하던 중 유한양행의 사업 조직망 전체를 독립운동의 지하조직에 활용하려는 계획을 세웠으며 해방 후 1946년 7월에 귀국하여 유한양행을 재정비하고, 대한상공회의소 초대회장으로 활동하였다. 1952년에는 고려공과기술학교, 1964년에는 유한공업고등학교를 설립하였다. 1969년 경영에서 은퇴하며 전문경영인에게 유한양행의 경영권을 인계하였고, 유언을 통해 사회 환원을 선언했는데 그때가 1971년 3월 11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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