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빌라이 칸, 중국을 먹다
쿠빌라이 칸의 원나라는 1276년 남송의 수도 임안을 함락시켰고 남송 공종은 항복하였다. 이로써 남송은 사실상 멸망했다. 그러나 육수부, 문천상(文天祥), 장세걸(張世傑) 및 진의중(陳宜中) 등 일부 남송의 유신들은 임안 함락과 동시에 공종의 서형 조하를 황제(단종)로 추대하고 원나라에 대한 저항운동을 계속했다. 원나라 군대는 이들을 격파하는 한편, 천주(泉州)의 실력자로 해상교역으로 부를 축적한 포수경(蒲壽庚)을 포섭하여 화남지역을 지배하에 두게 되었다.
서서히 강남에서 광둥 성으로 밀려난 옛 남송군은 병사한 단종의 후임으로 동생인 조병을 황제로 옹립하니 이가 남송 소제이다. 이후 선단으로 해상을 떠돌며 저항을 계속하여 현재의 홍콩 주변에 있던 애산이란 당시 아무것도 없던 섬에 요새와 행궁(行宮)을 구축하고 철저항전의 의지를 보였다. 한편 원나라군은 포수경으로부터 선박 및 숙련된 선원을 제공받게 되어, 약했던 해상에서도 남송군과 대등한 전투 능력을 가지게 되었다.
원나라측의 기록에 의하면 옛 남송함대는 1,000척의 대형 선박을 모두 한데 묶어서 화공 대책으로 선체 외장에 진흙을 칠하고 적이 가까이 오지 못하게 긴 목재를 묶어서 붙여놓아 방어망을 만들어 기름을 이용해 화공을 가하려는 의도를 가진 원나라군을 물리쳤다.
그러나 1279년 2월에 이르러, 기나긴 소모전에 피로가 쌓인 옛 남송군은 패주했다. 이것에 절망한 신하 및 간부들이 차례로 물에 뛰어들었고, 그 와중에 육수부(陸秀夫)는 어린 황제에게 대학의 강의를 배안에서 하였다. 그러나 3월 19일 저녁쯤 패배를 깨닫고, 소제를 안고 물에 뛰어들었다. 이것을 기점으로 전투는 종결되었고, 원나라군의 승리가 확정되었다. 이로써 원나라는 중국통일을 이루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