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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의오늘사건] 1978년 3월 24일

청록파 목월 박영종 시인, 주님의 곁으로...

by 나그네

박목월 시인의 본명은 "영종(泳鍾)"이나, 시를 쓸 무렵 본인의 필명을 "목월(木月)" 로 지었다. 목월의 필명은 그가 존경하는 변영로의 호 수주에서 나무 목변을 따온 것이고, 월은 김소월의 월을 땄다고 한다. 18세인 1933년, 개벽사에서 발행하는 잡지 《어린이》에 동시 「통딱딱 통짝짝」이 뽑혔고, 같은 해, 《신가정》 6월호에 그의 시 「제비맞이」가 당선되어 동시를 주로 쓰는 시인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1940년, 《문장》 9월호에 「가을 어스름」, 「연륜」으로 추천 완료하여 본격적으로 문단에 데뷔했다. 이 당시는 일제 강점기 말엽이었기에 이후 특별한 활동을 하지는 않았다.

맨 좌측부터 지훈 조동탁, 목월 박영종, 박두진이다

1945년, 대구 계성고등학교에서 교편을 잡게 되었다. 그러나 이듬해 1946년 6월, 목월은 조지훈, 박두진 3인과 유명한《청록집》을 발간했으며, 동시집인 『박영종 동시집』도 발간하였다. 여기에서 '청록파'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


전쟁이 끝나고 목월은 홍익대학교와 서라벌예술대학, 중앙대학교 등지에서 강의하였고, 한양대학교 교수가 되어 은퇴할 때까지 한양대학교에서 후학을 키우는 일을 계속적으로 담당하였다.


목월은 1977년, 자신이 봉직한 한양대학교에서 명예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다음 해인 1978년, 그는 자신이 출석하던 원효로 효동교회에서 장로 안수를 받았고 동년 3월 24일, 새벽에 산책하고 돌아온 후, 지병인 고혈압에 걸려 6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목월의 시는 그 특유의 서정성을 바탕으로 한 순수 시로 주목받고 있다. 특히 그의 시에 보이는 미학적인 측면은 한국의 현대 시문학을 풍성하게 해주는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


하지만 80년대를 기점으로 비판을 받는 경향이 강해지는데, 이는 그의 시가 가진 특유의 여린 서정성과 내면성 때문이다. 당시의 민주주의 운동의 시대적 상황에서 그의 시는 정치 이념적 논리에 의해서 비판을 받을 수 밖에 없었고, 그로 인해 그의 문학적 권위는 해체되기에 이르렀다. 따라서, 현실도피적 시인이라거나 혹은 음풍농월을 읊는 시인으로 폄훼되기도 하였다.


필자가 필명으로 쓰는 '나그네'는 박목월 시인의 시 나그네에서 따왔는데 그 정도로 나그네라는 시를 필자는 개인적으로 매우 애정하는 시이다.


나그네 - 박목월


강나루 건너서

밀밭길을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길은 외줄기

남도 삼백리


술 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놀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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