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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의오늘사건] 1908년 3월 23일

전명운과 장인환, 스티븐스를 SF에서 사살하다

by 나그네

스티븐스는 1904년 8월 22일 한일 외국인 고문 초빙에 관한 협정서를 강제 체결 할 것을 기인하여 12월 27일 대한제국 외부고문관으로 임명되었다. 스티븐스는 이후에도 제2차 영·일동맹과 뒤이은 포츠머스 조약에서 일본이 한국을 ‘병합’할 수 있는 길을 트는 데 크게 기여했다.

1905년 을사조약 체결 이후 초대 조선 통감 이토 히로부미의 설득으로 을사조약과 대한제국 합병을 정당화시키기 위해 수많은 친일 발언들을 했으며, 1905년 을사늑약, 고종의 강제 퇴위, 한일신협약 체결 때도 그는 배후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08년 3월 스티븐스는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여 대한제국을 비하하고, 일본의 보호통치를 옹호하는 발언을 하였다. 친일 발언으로 미국 내 수많은 재미 한국인들의 반감을 샀다.

1908년 3월 23일 오전 9시 30분경 워싱턴으로 가려고 샌프란시스코 페리역에 왔다가 재미교포 전명운의 저격과 폭행을 받았고 뒤이어 도착한 재미교포 장인환의 저격, 처단으로 2발의 총을 맞고 2일 뒤 샌프란시스코 성프란시스 병원에서 수술 도중 사망했다.


장인환과 전명운은 당시 교민들은 성금을 모아 네이던 코플란을 변호사로 선임했다. 전명운은 장인환의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블라디보스토크로 잠시 이주했다가 다시 샌프란시스코로 귀환, 그 곳에서 맥 필즈(Mack Fields)라는 이름으로 개명하고 1920년 결혼, 귀화하였다. 말년은 로스앤젤레스에서 세탁소를 운영하며 어렵게 생계를 꾸려 나갔다.


장인환은 자신의 행동이 정당했다고 주장하였고, 결과 금고 25년형을 선고 받았으나 10년 만인 1919년 가출옥하였고, 1927년 귀국하여 결혼을 하였으나 다시 샌프란시스코로 돌아갔다. 이후 병고에 시달리다가 1930년 투신 자살하고 말았다.

...한가지 더... 네이던 코플란 변호사의 통역을 당시 유명한 독립운동가이던 이승만에게 부탁을 하게 되는데 이때 이승만이 코플란에게 보낸 편지가 있다. 이를 옮기면 다음과 같다


‘지금 여러분께서는 우리 거사가 터럭만큼이라도 미국인들에게 언짢은 마음에서 나온 것이 아님을 먼저 설명해 알게 해야 합니다. 처음에는 생명을 해칠 계획 없이 누누이 그 미국인에게 (일제 식민의) 불법을 설명하였으나 그 미국인이 고집을 부리며 남의 나라와 충애(忠愛)를 멸시하여 공분(公憤)이 솟구쳐 벌어진 사건이라고 하십시오. 고명한 변호사를 고용해 천천히 설명하면 서양인에게 배일(排日)하는 마음이 생겨 거사를 심히 원수로 삼지 않을 듯합니다. 지금 내가 (샌프란시스코로) 간들 이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겠습니다. 재정을 아끼는 것이 갇힌 분들을 위한 사후책입니다. (재정을 낭비하면) 방해가 생길 터이니, 잠시 지켜봄이 서로 편할 듯합니다. 하루이틀에 결론이 날 일이 아니니 천천히 더 상의함이 좋을 듯합니다. 나머지는 마음이 흔들리고 손이 떨려서 예의를 갖추지 못하고 올립니다(餘心擾手戰 不備謝上). 3월 25일 이승만 배상’

그래서 서던 캘리포니아 대학교에 유학하고 있던 신흥우가 통역을 맡았다. 그런데... 훗날 신흥우는 변절하여 친일파가 된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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