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옥균, 상하이에서 피살당하다
갑신정변을 일으킨 주역으로 정권을 잡은 듯 했던 김옥균은 청군의 개입으로 3일만에 실패하고 일본으로 도주한다. 하지만, 이미 끈 떨어진 김옥균을 반겨줄 일본이 아니었다. 그렇게 불우한 망명생활을 하며 일본에서 10년을 견딘다.
그동안 두차례의 자객 암살을 당할뻔한 김옥균은 반 자포자기심정으로 도쿄 윤락가를 배회하며 주색 방랑에 빠져든다. 그러면서 게이샤들과의 관계에서 자식을 낳기도 하였고, 이런 김옥균의 행태에 박영효가 비판을 하면서 서로 간에 결별을 하기에 이른다.
김옥균이 주색방탕하며 일본을 방랑하자 청나라의 눈치를 보던 일본은 그를 오가사와라와 홋카이도로 두번이나 유배를 보내버린다. 유배를 끝낸 김옥균은 청의 눈치를 보는 일본보다 청나라 실권자 리홍장과 담판을 짓기로 하고 청나라로 망명을 한다.
이때, 홍종우가 김옥균에게 접근한다. 홍종우는 최초의 프랑스 유학생이어서 개화파인 김옥균의 마음에 들었다. 게다가, 김옥균의 먼 친척이라고 거짓으로 속인데다가 프랑스 요리 솜씨가 기가 막혀서 김옥균은 홍종우를 자기편으로 철썩같이 믿었다. 그리고, 믿었던 홍종우에게 김옥균은 리볼버 권총으로 저격당해 피살당하며 파란만장한 생을 마감한다.
그렇게 피살을 당한 김옥균의 시신은 한국으로 시신이 이송되고, 이후 반역자라는 이유로 능지처참을 당한데다가 목은 잘려 길거리에 효수되기까지 하는 등 죽어서도 수모를 당하게 된다.
갑신정변의 계획자, 조선의 개혁을 꿈꾸었던 몽상가, 친일적이었으나 일본으로부터 버림받은 조선의 풍운아 김옥균은 그렇게 타지에서 1894년 3월 28일에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