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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의오늘사건] 1927년 3월 29일

영원한 청년 월남 이상재, 늙지 않는 나라로~~

by 나그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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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재는 1850년 10월 26일 충청남도 서천군 한산면에 살던 선공감(繕工監;오늘날 국토교통부)에서 가감역(假監役;토목과 건물수리 담당 종9품 관직)을 지낸 이희택(李羲宅)과 밀양 박씨의 아들로 전형적인 선비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고려말의 학자 이색의 후손으로, 이색의 장남 이종덕(李種德)의 15대손이었다. 13대 선조가 사육신으로 유명한 이개(李塏)이며, 토정비결을 지은 토정 이지함과 화가 이산보, 선조 때 영의정을 지낸 이산해가 다 그의 집안이다.

최초 주한미국대사 박정양

그는 1867년 과거에 낙방한 후 박정양의 개인비서로 관계에 투신하였으며 1881년 일본을 시찰, 개화 사상을 접하였다.


귀국 이후 개화파 관료로 활동하다가 갑신정변에 연루되어 관직에서 사퇴하였다. 정치적 스승인 박정양의 몰락 이후 고향에서 은거하다가, 미국 공사관 2등 서기관으로 부임하였다. 이후 조선을 속국으로 여기고 외교에 개입한 청나라 사신을 물리치고 직접 외교의 길을 열었다. 귀국 이후 독립협회, 만민공동회에서 민중 계몽운동을 하였다.

독립협회 사건으로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었을 당시의 모습 (맨 왼쪽 서있는 이가 이승만, 앞 즐 오른쪽에서 두번째가 이상재 선생)

그러나 1899년 11월 독립협회, 만민공동회는 강제 해산되고, 1902년 개혁당 사건에 연루되어 투옥되었다가 풀려났으며 한일병탄 이후에는 관직을 사퇴하였다. 1905년 이후에는 윤치호와 함께 YMCA를 지도하였으며, 1919년의 삼일운동에는 참여를 거부하였으나 관련자로 지목되어 연행되기도 했다. 이후 교육과 청년의 계몽, 각성을 역설하는등 1920년대 중반 조선일보 사장과 신간회 활동을 하였다.

1957년 이상재 선생 묘비식에 참석한 이승만 대통령

1927년 2월 신간회 회장에 취임하였으나, 다음달인 3월 29일 병환으로 세상을 뜨고 말았다.

그는 후일 대한민국의 대통령을 역임한 이승만의 정치적 스승 중의 한사람이었다.

그렇기에 1957년 이승만 대통령은 이상재 선생 묘비식에 참석하기까지 할 정도로 존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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