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우르바노 8세가 선출되다
본명은 마페오 바르베리니. 1568년 4월 피렌체의 귀족 안토니오 바르베리니와 카밀라 바르바도로의 아들로 태어났다. 16세가 되던 해에 숙부의 상속인이 된 그는 예수회의 지도를 받고 1589년 피사 대학교에서 법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1601년 바르베리니는 숙부를 통해 교황 클레멘스 8세에게 등용되어 프랑스 국왕 앙리 4세의 궁정에 교황 특사로 파견되었다. 숙부가 사망한 후 재산을 상속받은 그는 로마에 있는 저택을 하나 구입해서 그곳을 화려한 르네상스풍으로 꾸몄다.
1623년 8월 6일 교황 그레고리오 15세의 후임자를 뽑기 위해 소집된 콘클라베에서 그 해 8월 5일에 바르베리니가 추기경 55명 중 50표를 얻어 선출되어 우르바노 8세(Urbanus PP. VIII)가 되었다.
우르바노 8세의 재위기간은 30년 전쟁(1618-1648) 중 21년 동안이었으며, 당시 기준으로 보아도 다사다난한 일을 겪은 사람이었다. 우리가 잘 아는 갈릴레오 갈릴레이로 하여금 지동설을 철회하도록 한 교황이 우르바노 8세이다.
우르바노 8세는 자신의 세력 확대를 도모하기 위해 대대적으로 족벌주의 정책을 펼쳤다. 동시대 사람들이 바르베리니 왕조가 세워진 것 같다고 비유할 정도로 바르베리니 가문은 교황을 통해 크게 부유해졌다. 그는 동생과 조카를 모두 추기경에 서임했다. 역사학자 레오폴드 폰 랑케는 우르바노 8세의 통치기간 동안 그의 직계 가족들이 개인 재산을 1억 5백만 스쿠디만큼 모았다고 추정했다.
1638년 우르바노 8세는 교황 칙서 《나에게 맡겨진》(Commissum Nobis)을 반포해 남아메리카의 예수회 정착촌에 거주하는 원주민들을 노예로 삼는 것을 금지함으로써 남아메리카에서 예수회가 선교를 계속 할 수 있도록 보호했다. 동시에 그는 중국과 일본에서의 선교를 예수회에게만 허용한 교황 그레고리오 13세의 선교 독점 정책을 폐지하고 다른 수도회 및 선교회에게도 개방했다.
우르바노 8세의 군사적 개입은 이탈리아에서 교황령의 독립을 지키기 위한 힘의 균형을 유지하기 보다는 유럽에서 가톨릭 교세를 회복하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그는 교황의 영토를 넓힌 마지막 교황이다.
그는 판테온의 천장과 동판에서 청동을 벗겨내 성 베드로 대성전의 발다키노를 제작하는데 사용했다. 이 일로 “바르바리안(야만인)도 하지 못했던 일을 바르베리니 가문이 해냈다”며 풍자하는 말이 생겼다.
우르바노 8세와 그의 가문은 예술을 전격적으로 후원했다. 그는 포교성성 청사, 바르베리니 광장의 트리톤 분수, 성 베드로 대성전의 발다키노 및 성 베드로의 의자 등 로마의 주요 건축물 및 장식들을 의뢰했다. 게다가 니콜라 푸생과 클로드 로랭 등의 화가들도 후원했다. 이러한 그의 통치를 기념하는 가장 기념비적이라고 할 만한 작품 중의 하나는 피에트로 다 코르토나가 바르베리니 궁전의 대형 객실천장에 그린 ‘하느님의 섭리와 바르베리니 가문의 권세에 대한 우의(Trionfo della Divina Provvidenza)’이다.
이러한 군사적·예술적 활동의 결과, 교황청의 부채가 엄청나게 늘어났다. 우르바노 8세가 물려받은 1,600만 스쿠디의 빚은 1635년에 이르러서 2,800만 스쿠디로 늘어났으며, 1640년에 이르면서 교황청의 빚은 이자 상환에 있어서 교황청의 연간 소득의 80% 이상이나 되는 3,500만 스쿠디까지 늘어났다.
우르바노 8세는 1644년 7월 29일에 선종했는데, 소식이 전해지자 캄피돌리오 언덕 위 콘세르바토리 궁전 옆에 있던 교황의 흉상은 성난 군중들에 의해 금새 파괴되었고, 추기경들 사이에서 바르베리니 가문의 일부 인사를 교황으로 선출하지 말자는 합의가 이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