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은 중세시대 타락한 기독교에서 벗어나 개신교의 시발점을 알렸던, 그로부터 시작된 종교개혁을 일구었던 루터의 영향 아래 있었다. 그러한 영향하에서 기본적으로 코랄(루터파 찬송가)을 중요시하였지만, 새로운 모노디(단일 멜로디) 양식 또한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이러한 발전은 특히 1618년부터 1648년까지 독일 전역을 휩쓴 30년 전쟁이라는 격변의 배경 속에서 이루어졌다. 전쟁으로 인한 사회적, 경제적 황폐화는 음악 후원을 크게 위축시켰고, 이로 인해 대규모 편성이 아닌 소규모 앙상블로 연주할 수 있는 형식의 발전을 가속화했다.
독일에서는 종교 콘체르토가 유행하였는데, 이러한 선구자 역할은 요한 헤르만 샤인(Johann Hermann Schein)이다. 그는 이탈리아 양식을 독일어 가사에 적용하는 데 기여했다. 이러한 콘체르토의 악곡 수가 늘어나면서 그것이 독일만의 종교 칸타타의 효시가 된다.
샤인 이후 더욱 다양한 가사들과, 독창, 합창 등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또한 옛날부터 수난시기에 연극처럼 하던 이야기들을 음악으로 재구성한 수난곡이 인기를 끌었다. 이 두 장르뿐 아니라 다양한 종교 음악 장르들이 인기를 끌었는데 오라토리오와 모테트 등이 자주 연주되었다.
이 시기 가장 위대한 작곡가는 두말할 것 없이 바흐 이전의 독일이 낳은 최고의 작곡가로 평가받는 하인리히 쉬츠(Heinrich Schütz)이다. 그는 직접 이탈리아로 유학을 다녀와 베네치아 악파의 복합창(cori spezzati) 양식과 새로운 표현 기법들을 독일에 풍부히 녹여냈다.
그는 모테트, 종교 협주곡, 오라토리오 등 수백 곡을 작곡했으며, 그의 대표적인 종교 협주곡 모음집으로는 이탈리아 양식을 독일어 가사와 결합한 《종교적 합창곡(Symphoniae Sacrae)》이 있다. 쉬츠는 '수난곡'을 최초로 작곡한 독일 교회음악의 아버지라 불린다.
기악곡에서 보면 북독일악파의 시초라 불리는 얀 피터르존 스벨링크(Jan Pieterszoon Sweelinck)가 독보적인 오르간 작품들을 작곡하였다. 그는 사무엘 샤이트(Samuel Scheidt) 같은 후세대 오르가니스트 등을 지도했다. 게다가 샤이트의 제자였던 프란츠 툰더(Franz Tunder) 등을 배출하였으며, 툰더의 사위이자 후계자인 디트리히 북스테후데(Dietrich Buxtehude)로 이어지는 위대한 계보를 형성하며 훗날 오르간이 '악기의 왕'이 될 수 있는 길을 열어주기도 하였다. 북스테후데는 화려한 토카타와 파사칼리아로 북독일 오르간 음악의 정점을 이루었으며, 이는 훗날 J. S. 바흐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한편 남부 독일의 요한 야콥 프로베르거(Johann Jakob Froberger) 역시 쳄발로 음악을 주류로 올려놓는 데 노력했으며, 건반 모음곡, 즉 알르망드-쿠랑트-사라반드-지그로 이어지는 춤곡 장르를 정형화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