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우리아 왕조의 건국은 찬드라굽타 마우리아가 스승 차나키야의 지략을 바탕으로 난다 왕조를 무너뜨리고 북인도를 통합하는 과정을 거친다. 찬드라굽타는 당대 명석한 학자 차나키야를 스승으로 삼아 난다 왕조 타도의 계획을 세웠다. 기원전 326년,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철군하면서 인도 북서부(펀자브 지역)에 발생한 권력 공백을 찬드라굽타는 기회로 삼았다. 그는 폭정에 지친 백성과 난민, 장교들을 규합하여 세력을 키우고 펀자브를 장악하며 군사적 기반을 구축했다.
찬드라굽타의 세력은 폭군 다나 난다의 난다 왕조 (수도: 파탈리푸트라)를 목표로 삼았다. 기원전 323년에서 321년경 사이에 벌어진 간다-마우리아 전쟁에서 승리하여 난다 왕조의 수도 파탈리푸트라를 점령하고 난다 왕조를 멸망시켰다. 이후 기원전 322년경에 찬드라굽타 마우리아는 마가다를 기반으로 마우리아 제국을 창건하고 초대 황제로 즉위했다.
건국 직후, 찬드라굽타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후계자인 셀레우코스 1세 니카토르와 충돌했다. 기원전 305년경 마우리아-셀레우코스 전쟁에서 승리한 찬드라굽타는 평화 조약을 통해 인더스강 서쪽의 광대한 영토를 할양받아 북인도 전체를 확고히 통일했다. 이 조약의 대가로 찬드라굽타는 셀레우코스에게 전투 코끼리 500마리를 선물했다.
마우리아 왕조 3대 왕 아소카 대왕의 즉위 과정은 치열한 왕위 다툼으로 시작되었으나, 칼링가 전쟁 이후 불교에 귀의하면서 인도 통치 이념을 다르마(Dhamma)로 전환하는 정책을 펼쳤다.
아소카는 왕위 계승 서열에서 밀렸으나, 아버지 빈두사라 임종 시 이복형제 99명을 제거했다는 전설이 전해질 정도로 치열한 왕위 쟁탈전을 거쳐 공식적으로 즉위했다. 즉위 초기, 그는 '지옥(뇌옥)'을 만들어 사람들을 잔혹하게 살해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 잔혹한 통치자로 알려졌다. 재위 8년째인 기원전 261년 칼링가 정복 전쟁에서 수십만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는 참혹함을 목격하고 큰 충격과 회의를 느꼈으며, 이를 계기로 불교에 귀의하고 정복 전쟁을 포기했다.
아소카는 참회 이후 불교를 통치 이념으로 삼아 '다르마에 의한 통치'를 천명했다. 전륜성왕(轉輪聖王) 사상을 통치 이념으로 삼아 무력이 아닌 정법(正法)으로 세상을 다스리고자 했다. 다르마는 불교 교리보다는 자비, 관용, 비폭력, 부모 공경 등 모든 백성에게 적용되는 보편적인 윤리 덕목을 강조한 통치 지침이었다.
제국 전역에 바위 칙령과 석주(石柱) 칙령을 세워 다르마를 백성들에게 직접 공포했으며, 이는 불교를 왕의 공식적인 메시지로 만든 것이다. 불교 교단의 통일과 교리 정립을 위해 제3차 불교 결집을 후원했으며, 이는 상좌부 불교의 기틀이 되었다. 담마-마하마트라(Dhamma-Mahamatra)라는 관리직을 신설하여 다르마를 전파하고 백성들의 도덕적 생활을 감독하게 했다.
아들 마힌다와 딸 상가미타를 포함한 포교 사절단을 스리랑카, 동남아시아, 서아시아 등으로 파견하여 불교를 인도 대륙 밖으로 전파하는 세계 종교화의 토대를 마련했다. 길을 따라 우물을 파고 약초, 보리수나무 등을 심어 백성과 동물을 위한 복지 증진에 힘썼다. 칙령을 통해 왕실의 동물 도살을 줄이고 생명을 죽이는 행위를 금지하는 등 비폭력을 실천하고자 했다. 아소카 대왕의 이러한 통치와 정책은 오늘날 인도 국장에 새겨진 사르나트의 사자상과 인도 국기의 아소카차크라(법륜)로 남아 인도 정신의 상징이 되어 있다.
아소카 대왕이 기원전 232년경 사망하자, 중앙 집권 체제가 곧바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아소카의 평화적인 다르마 정책이 군사적 활력을 약화시켰고, 광대한 제국을 효과적으로 통제할 만한 강력한 후계자가 없었다. 제국은 동부와 서부로 분열되었고, 여러 왕자들이 각 지역에서 경쟁하며 중앙의 권위가 실추되었다.
광대한 제국의 변방 지역과 지방 행정 단위들이 중앙의 통제에서 벗어나기 시작하며 독립적인 움직임을 보였다. 특히 북서부의 그리스 세력과 데칸 고원의 사타바하나 왕조 등이 세력을 확장했다.
아소카 대왕 시기에 막대한 비용이 소요된 불교 기념물 건설과 광범위한 복지 정책으로 인해 제국의 재정은 크게 악화되었다. 중앙 정부는 대규모 군대를 유지하고 행정 시스템을 운영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마우리아 왕조의 마지막 왕은 브리하드라타(Brihadratha)였다. 그의 통치기에 제국의 군사력과 정치적 안정성은 극도로 취약해졌다.
기원전 184년, 브리하드라타는 자신의 군대 사령관이었던 푸샤미트라 슝가(Pushyamitra Shunga)에 의해 시해당했다. 푸샤미트라 슝가는 브리하드라타를 제거한 뒤 스스로 왕위에 올라 슝가 왕조(Shunga Dynasty)를 건국하면서, 약 140년간 지속된 마우리아 제국은 완전히 멸망했다.
마우리아 왕조는 인도 역사상 최초로 인도 아대륙의 대부분을 하나의 통일된 정치체제 아래 둔 대제국이었다. 특히 3대 왕인 아소카 대왕 시대에는 남쪽 일부를 제외한 거의 모든 인도 아대륙과 아프가니스탄 일부까지 아우르는 거대한 제국을 형성하여, 이후 인도 왕조들이 추구하는 통일 국가의 원형을 제시했다.
마우리아 왕조는 광대한 영토를 효율적으로 다스리기 위한 강력한 중앙 집권적 행정 시스템을 구축했다. 수도 파탈리푸트라를 중심으로 관료 조직을 정비하고 지방에 총독을 파견하여 체계적으로 통치했다. 스승 차나키야가 저술했다고 알려진 경전 《아르타샤스트라(Arthashastra)》는 마우리아 왕조의 행정과 정치, 경제, 군사 운용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을 담고 있으며, 이는 고대 인도 정치 사상의 중요한 근간이 되었다.
마우리아 왕조의 통치 아래 불교는 인도를 넘어 세계로 확산하는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했다. 다르마(Dhamma)라는 불교 기반의 윤리 통치를 선포하였고, 이로 인해 불교는 인도 밖으로 뻗어나가 세계 종교로 발전하는 중요한 기반을 다지게 되었다.
석주(石柱)와 스투파(탑)는 마우리아 예술과 건축의 정점을 보여주며, 오늘날 인도 국장에 사용되는 사르나트의 사자상과 국기의 법륜(아소카차크라)은 마우리아 왕조의 정신적 유산으로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