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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의 오늘사건] BC 48년 8월 9일

율리우스 카이사르, 파르살루스 전투에서 승리하다

by 나그네

로마가 공화정이던 시기 로마의 유력자였던 율리우스 카이사르,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가 비밀리에 협정을 맺으며 로마 정권을 획책할 계획을 세운다. BC 60년 폼페이우스가 크라수스와 손을 잡고 카이사르의 집정관 당선을 도와주어 성공시킨다. 그리고 이때부터 로마는 공화정이 무너지며 1차 3두정치 시대를 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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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BC 54년 크라수스가 파르티아와의 전쟁중에 사망하고 폼페이우스가 원로원 파로 기울어지며 둘의 관계는 결렬이 되고 만다. 그리고, 갈리아 집정관직에 있던 카이사르가 반란을 일으키니 그것이 ‘카이사르의 내전’이다. 파르살루스는 카이사르 내전 중의 한 부분이자 동시에 로마 권력을 장악하게 된 계기가 된 전투이다.


파르살루스 전투에 대해서 설명하려면 왜 그리스 파르살루스에서 카이사르가 전투를 했는지 그 경과를 알아야 하는데, 그렇다고 카이사르의 내전을 다 설명할 수는 없고 간단하게 요약하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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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말하는 ‘주사위는 던저졌다’라는 명언을 남기며 BC 49년 병력을 이끌고 루비콘 강을 건너게 된다. 한마디로 로마에 대한 반란이었다. 폼페이우스와 원로원 세력은 카이사르를 이기지 못하고 로마를 포기한채 그리스로 도주하게 된다.


그리고, 카이사르는 그리스로 가지 않고 본래 폼페이우스의 본거지인 히스파니아, 현재의 이베리아 반도를 점령하게 된다. 곧바로 북아프리카 원정을 하면서 폼페이우스를 압박하려고 하였다. 카이사르는 투항병 등 4개 군단과 기병을 쿠리오에게 맡기는데 이 전쟁에서 쿠리오는 10일만에 처참하게 패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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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로인해 카이사르 세력은 위축되었고, 폼페이우스 세력은 동방진영의 세금으로 카이사르 세력을 뛰어넘게 된다. BC 48년 1월 5일 카이사르는 병력을 이끌고 그리스에 도착하나 곧바로 폼페이우스의 반격으로 해군 대부분을 상실하게 된다. 서로 공방을 거듭하다가 급기야 6월 25일에 디카리움에서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에게 병력 대부분을 소실당하는 대패를 당하게 된다. 그런데, 폼페이우스가 이때 적극적으로 카이사르를 압박하지 않고 소극적 전략을 대처하게 된다. 그러는 동안 카이사르는 그리스 내륙으로 도주하며 병력을 보충하게 되었고 그 시기에 다시 추격을 시도한 폼페이우스는 카이사르와 BC 48년 8월 9일에 파르살루스 평원에서 마주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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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마주한 병력은 폼페이우스군이 47,000에 기병 7,000인 반면 카이사르는군은 22,000에 기병 1,000이었다. 압도적인 폼페이우스군의 우세였다. 숫적으로는 폼페이우스군이 우세했으나, 질적으로는 갈리아 시절부터 카이사르를 따랐던 역전의 용사들이었다. 게다가 카이사르의 전술이 뛰어났던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폼페이우스는 기병 7,000을 전략에 충실하게 카이사르 군에 돌격을 시킨다. 그러나, 카이사르는 이 기병대를 상대로 도발을 하여 자신의 지역으로 잔뜩 끌어들인 후 매복해있던 병사들로 하여금 기병대를 급습하게 하므로써, 보병과의 연계작전을 좌절시킨다. 그리고, 곧바로 폼페이우수 군의 우측을 급습하여 붕괴시키면서 승기를 잡고 폼페이우스는 퇴각을 하게 된다. 카이사르는 전사자 200여명, 반면 폼페이우스군은 15,000명 사망에 24,000명이 포로로 잡히는 대참패였다.

그리고, 이 전투로 카이사르의 정적이 제거되면서 내전은 거의 종착역에 이르게 된다. 로마는 점차 공화정에서 제정 시대로 변환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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