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차 십자군 전쟁이 끝나다
십자군 전쟁이 왜 벌어졌는지를 배경적으로 알아야 오늘의 사건으로 1차 십자군 전쟁이 끝나는 것에 대한 맥락이 이해가 될 것이다.
로마는 테오도시우스 황제때 제국을 동서로 분할하여 아들들에게 통치를 맡겼는데 이때 동부를 동로마, 서부를 서로마라 부르며 분열되기에 이른다.
예언자 무함마드가 아라비아 반도에서 이슬람교를 창시하였고, 예루살렘은 637년 공성전 때 함락되어 비잔티움 제국에게서 이슬람 세계로 넘어가게 된다. 그렇다고 하여 아예 왕래가 단절된 것은 아니어서 성지순례도 허용하고, 기독교도들에게도 법적 보호를 해주고, 통혼도 가능하였다. 그러다가, 투르크 족이 서진하여 아랍을 장악하면서 관계가 변화하기에 이른다.
게다가 1054년에는 서로마 교회와 동로마 교회가 상호 파문, 기독교 세계가 두쪽나는 동서 교회의 분열이 일어났다. 더불어서 교황과 신성로마황제 중 어느 쪽에 사제 서임권에 대한 우선적 권리가 있느냐는 서임권 투쟁이 발발하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권력을 증대시키고자 한 교황령의 종교적 선전선동에 의해 무슬림들로부터 팔레스타인 성지를 되찾는 "정당한 전쟁"에 대한 요구와 관심이 천주교 세계 인구 전반에 걸쳐 극렬해졌다. 여기에 동로마 제국 황제였던 알레시우스 1세가 "성스러운 교회를 수호할 수 있도록 이교도들에게 맞설 원군을 보내달라"란 편지를 보내고 여기에 응답하여 군대를 모집하여 파견하니 십자군 전쟁이다. 그 십자군 전쟁의 시작이 1차 십자군 전쟁이다.
십자군은 1099년 7월 15일 십자군은 기나긴 공성전 끝에 예루살렘을 함락시키는 데 성공했고, 얼마 안 있어 십자군은 이집트의 파티마 군대가 예루살렘 탈환을 위해 군대를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8월 10일 성묘의 수호자(Defender of the Holy Sepulchre)라는 칭호를 받은 고드프루아는 예루살렘에 남아있는 십자군 부대를 이끌고 아스칼론(Ascalon)으로 향했고, 하루 동안 행군을 계속하였다. 그리고 속속들이 피에르, 로베르 2세, 아르누프, 레몽 4세, 로베르 등이 합류하였다.
파티마군의 군대는 셀주크 투르크, 아라비아인, 페르시아인, 아르메니아인, 쿠르드인, 그리고 에티오피아인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파티마 군대는 아스칼론의 항구에 정박하여 십자군을 공격할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십자군의 반격이 더 빨랐다.
12일 아침, 십자군 정찰부대가 파티마 부대의 위치를 파악하여 보고했으며 십자군은 파티마 군이 있는 곳으로 진군하였다. 반면 파티마군은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전투를 벌이게 되니 전쟁은 매우 짧은 시간안에 끝나고 만다. 파티마 군은 병력을 대부분 상실하고 패퇴하였다. 그러나, 십자군 부대는 혹여 원정부대와 함께 2차 반격에 대비하였다. 13일, 정찰병의 보고로 파티마 군이 본국으로 도주하였음을 확인하고 승전보를 울렸다.
1차 십자군 전쟁은 이렇게 승리를 하게 되었는데, 이는 7차 십자군 원정 중 유일한 승리로 기록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