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멜, 제주도에 도착하다
네덜란드 상인 하멜이 표류하다가 제주도에 도착한 날이다. 당시 조선왕조실록에는 이렇게 기록이 되어져 있다.
有舡一隻, 敗於州南, 閣於海岸, 使大靜縣監權克中、判官盧錠, 領兵往視之, 則不知何國人, 而船覆海中, 生存者三十八人, 語音不通, 文字亦異。
배 한 척이 고을 남쪽에서 깨져 해안에 닿았기에 대정 현감(大靜縣監) 권극중(權克中)과 판관(判官) 노정(盧錠)을 시켜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보게 하였더니, 어느 나라 사람인지 모르겠으나 배가 바다 가운데에서 뒤집혀 살아 남은 자는 38인이며 말이 통하지 않고 문자도 다릅니다.
船中多載藥材、鹿皮等物, 木香九十四包、龍腦四缸、鹿皮二萬七千。
배 안에는 약재(藥材)·녹비(鹿皮) 따위 물건을 많이 실었는데 목향(木香) 94포(包), 용뇌(龍腦) 4항(缸), 녹비 2만 7천이었습니다.
碧眼高鼻, 黃髮短鬚, 或有剪髯留髭者。
파란 눈에 코가 높고 노란 머리에 수염이 짧았는데, 혹 구레나룻은 깎고 콧수염을 남긴 자도 있었습니다.
其衣則長及䯗, 而四䙆衿旁袖底, 俱有連紐, 下服則襞積而似裳。
그 옷은 길어서 넓적다리까지 내려오고 옷자락이 넷으로 갈라졌으며 옷깃 옆과 소매 밑에 다 이어 묶는 끈이 있었으며 바지는 주름이 잡혀 치마 같았습니다.
使解倭語者問之曰: ‘爾是西洋吉利是段者乎?’ 衆皆曰: ‘耶耶。’ 指我國而問之, 則云高麗, 指本島而問之, 則云吾叱島, 指中原而問之, 則或稱大明, 或稱大邦, 指西北而問之, 則云韃靼, 指正東而問之, 則云日本, 或云郞可朔其, 仍問其所欲往之地, 則云郞可朔其云。
왜어(倭語)를 아는 자를 시켜 묻기를 ‘너희는 서양의 크리스챤[吉利是段]인가?’ 하니, 다들 ‘야야(耶耶)’ 하였고, 우리나라를 가리켜 물으니 고려(高麗)라 하고, 본도(本島)를 가리켜 물으니 오질도(吾叱島;성종시기 오이도를 오질이도라고 부른 기록이 있으나 오질이도가 오질도인지는 확인 불가)라 하고, 중원(中原)을 가리켜 물으니 혹 대명(大明;명나라)이라고도 하고 대방(大邦;대국)이라고도 하였으며, 서북(西北)을 가리켜 물으니 달단(韃靼;타타르족)이라 하고, 정동(正東)을 가리켜 물으니 일본(日本)이라고도 하고 낭가삭기(郞可朔其;나가사키)라고도 하였는데, 이어서 가려는 곳을 물으니 낭가삭기라 하였습니다.
하멜의 본명은 Hendrik Hamel.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서기 겸 항해사. 1653년 상선 스페르버르호(Sperwer)를 타고 일본 나가사키로 향하던 중 제주도 부근에서 폭풍을 만나 표류, 제주도에서 몇개월간 억류되어 있다가 일행들과 함께 한양으로 압송되었다. 한양에 도달한 하멜은 효종을 알현하였고 효종에게도 일본으로 가게 해달라고 간청했으나 역시 기각되어 훈련도감에 소속되었다. 항해사에 불과한 하멜에게서 서양의 기술을 배우려고 했던 효종의 북벌 의지는 강력했다 볼 수 있다.
현종때 극심한 흉년이 들었고, 부친 효종과 달리 이방인들에게 호의적이지 않아서 이들을 이배했는데 이때 하멜은 전라좌수영으로 가게 되었다. 그러다가 1666년 동네 어부의 어선을 사서 동료 8명과 함께 탈출에 성공 본래 가려고 했던 나가사키 데지마에 도착한다. 이후 나머지 동료들도 송환받아 1668년 네덜란드에 돌아가게 되었다. 그리고 동인도회사에 13년간 받지 못한 급여를 청구하게 되는데 이에 대한 증거로 제출하기 위해 쓴 것이 ‘하멜표류기’와 ‘조선왕국기’이다.
하멜표류기는 기본적으로 조선에 대해서 비우호적인 태도로 기술되어 있다. 13년간 노예와 다름없는 (처음에는 북벌의 필요성으로 인해서 훈련도감에 소속 시켰으나, 기술도 없고 밥만 축내고 나중으로 갈수록 북벌에 대한 의지도 없어지다보니 이들을 그냥 일꾼으로 부렸다) 생활을 했으니 그럴 수밖에 없으며, 밀린 급여를 요구하는 글이다보니 자신의 고생담을 기재해야 급여를 받을 가능성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책이 어마무시하게 유럽에 인기를 끌게 되면서 조선에 대한 유럽의 관심, 특히 네덜란드의 관심이 증폭되는 계기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