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창 밖으로 빠르게 풍경이 지나간다. 일박이일의 여정을 보내고 돌아가는 길이지만 마치 한 달쯤 다른 세상을 다녀온 느낌이었다. 혼자라는 긴장감을 내려놓고 이제는 집으로 돌아가는 시간.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란 문장이 창문 위에 떠 올랐다. 돌아갈 곳이 있기에 홀로 떠도는 방황을 누릴 수 있었구나. 그렇기에 나는 여행을 끝 마친다는 아쉬움대신 또 다른 여행을 꿈꾸는 마음이 되어 힘들게 떠나왔던 곳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는 용기가 생겼다.
난 참으로 유약한 아이였다. 다섯 형제 중 제일 작고, 어려서부터 늘 잔병치레에 시달렸다. 유년 시절을 돌아보면 친구들과 내 두 발로 열심히 뛰어다닌 기억보다 엄마 등에 업혀 흔들렸던 장면이 더 많이 떠오른다. 학교 운동장의 먼지 냄새보다 코를 자극하는 병원의 소독약 냄새가 더 익숙한 아이, 그게 나였다. 아픈 아이는 늘 가족의 보호와 걱정 어린 눈길 속에 살아야 했다. 그렇게 자란 아이는 스스로 생각하는 힘을 키울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나 어떻게 해야 해?’
늘 그런 눈으로 타인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에피소드 하나.
중학생이 되어 처음으로 친구들과 문방구에 가서 맘에 쏙 드는 지우개를 하나 사가지고 왔다. ‘ 나 이런 거 혼자 해 봤는데 어때?’ 하는 심정으로 언니 앞에 필통을 슬쩍 밀어 놓았다. 언니는 “ 너 지우개 새로 샀어?”라는 말만 던진 후 방을 나갔다. 그때부터 나의 불안이 엄습해 오기 시작했다. 언니가 ‘잘 샀네’라든지 ‘이거 별로네’라는 피드백을 해 줘야 하는데 긍정도 부정도 아닌 의문문만 남겼기 때문이다.
새로 산 지우개가 언니 마음에 들었는지, 들지 않았는지의 기준은 나에게 정말 중요했다. 난 지우개 하나 사는 것도 언니들이랑 같이 가서 사든지 아니면 언니가 선택해서 사다 주는 것만 썼다. 나 스스로 결정 내려 선택하는 것을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는 허약하고 지극히 의존적인 아이였던 것이다.
이제 막 대학생이 된 나에게 어느 날 언니가 말했다. “ 넌 온실 속의 화초 같아”
무심코 한 말이 나를 아프게 찔렀다. 한 번도 내가 그렇게 나약한 사람이라고 생각해보지 않았었다. 보호라는 틀 안에 사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때부터였을까? 내 마음속에 몽글몽글 작은 반항심들이 피어오르기 시작한 것이. 나의 사춘기는 대학에 가서야 거센 폭풍으로 휘몰아쳤다. 그때부터 모든 것을 스스로 결정하지 못하는 내가 부끄러웠고 화가 났다. 뭐든지 혼자 해 보고 싶었다. 그 도전의 끝에 홀로 떠나는 여행을 결심했던 것이다.
난 이제 더 이상 ‘언니 맘에 들어야 하는 지우개’를 고르고 있는 어린 중학생이 아니다. 그때 당연히 해야 했던 경험들을 조금 늦었지만 이제라도 당당히 시작하고 싶었다.
그런 나에게 모든 것이 처음이란 의미를 담고 다가왔다.
처음, 혼자서 먼 곳까지 기차를 타는 거
처음, 모르는 집에 들어가 재워달라, 밥도 달라 말해보는 거
처음, 혼자서 낯선 곳에서 밤을 보내는 거
처음, 만나는 사람들과 잠깐이었지만 길동무를 하는 거
그 처음이란 단어가 주는 긴장의 반대 편에는 심장이 터질 듯한 벅차오름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무 일 없이 아니, 내 가슴에 ‘첫 여행 성공’이란 감격을 가득 채우고 돌아온 날. 나를 보는 언니의 눈빛은 분명 떠나보낼 때의 눈빛과는 사뭇 달랐다. 더 이상 나는 온실 속의 화초가 아니라 길가 틈새에서도 꽃을 피울 수 있는 들풀이 되어 돌아온 것이다. 언니는 이제 내 보호자라는 신분을 내려놓고, 한 발자국 떨어져 나 스스로 가는 길을 지켜봐 주는 ‘그냥 언니’로 돌아왔다. 그건 언니의 해방이었을까? 아쉬움이었을까? 지금도 궁금하다.
혼자 떠나는 여행은 용기가 필요하다. 그렇다고 ‘혼자 무서워서 어떻게 떠나?’라고 외면할 일도 아니었다.
내 여행의 결론은 심플하다. 걱정했던 것에 비해 충분히 할 만했다. 그리고 세상엔 좋은 사람, 따뜻한 사람이 훨씬 많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혼자 떠나보면 알게 된다. 내가 얼마나 괜찮고 멋진 사람인지를 발견하는 시간들이란 것을.
나는 더 이상 보호가 필요한 존재가 아니다. 내가 경험하지 못한 세상의 두려움보다는 가보지 않았기에 가슴 설레는 호기심으로 어디든 떠날 수 있는 유유자적 홀로 여행자라는 이름표를 달게 된 것이다.
누군가 “너 또 혼자여행 갈 거야?”라고 묻는다면 일초의 고민도 없이 답할 것이다.
“ 응, 또 가고 싶어”.